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066
한자 秉天祠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45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9년 8월 3일연표보기 - 병천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지정
현 소재지 병천사 -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458]지도보기
원소재지 병천사 -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458]
성격 사우
양식 골기와 팔작지붕[존심당]|맞배지붕[현전]
정면 칸수 5칸[존심당]|3칸[현전]
측면 칸수 3칸[존심당]|2칸 반[현전]
문화재 지정 번호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사우.

[개설]

병천사(秉天祠)는 1924년 광주의 부호였던 붕남(鵬南) 지응현(池應鉉)과 광주 유지들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극복하고 애국정신을 선양하려는 취지에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의재(毅齋) 지용기(池湧奇),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 철산(鐵山) 지여해(池汝海), 표곡(豹谷) 지계최(池繼崔)를 제향하기 위하여 1924년 건립한 사우이다.

[위치]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458]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강당으로 사용하는 존심당(存心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골기와로 된 팔작지붕의 웅장한 전통한옥 건물이다. 앞뜰에는 화강암으로 된 팔각 간주석등(竿柱石燈)이 있다. 제액(題額)은 해관(海觀) 윤용구(尹用九)가 썼으며, 사우 입구에는 병천사 건립에 공이 컸던 붕남 지응현의 공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사당격인 현전(賢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 정도이며, 원주기둥과 함께 높은 화강암 주춧돌이 특징이고, 맞배지붕의 웅장한 한옥 건물이다.

[현황]

병천사는 사당격인 현전, 영정을 모신 영정각(影幀閣), 강당인 존심당, 동재와 서재 등 10여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971년 사진을 보면 사우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서원 입구 비석과 홍살문이 있었는데 도심이 개발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사우 주위에는 아파트들이 둘러싸고 있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는 6만 6200㎡[2만여 평]이었으나 현재는 약 1만 3223㎡[4천 평] 정도로 축소되어 있다.

배향된 충신과 공신은 고려 말 충신 정몽주, 고려 말 공신 지용기, 조선조 선조와 인조 때 공신으로 광주 출신인 금남 정충신, 병자호란 때 영웅 철산 지여해, 병자호란 때 명장 표곡 지계최를 배향하고 있다. 사당 입구의 현정문(賢正門)은 삼문(三門)으로 대문에 커다란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현전처럼 원주형의 주춧돌과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영정각에는 배향된 다섯 분과 이 사당을 건립하는 데 공이 큰 붕남 지응현의 영정도 함께 있다. 지응현은 1867년 1월 4일 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땅의 소중함을 청년들에게 일깨워주었고, 민족정신의 고양을 위하여 병천사 건립 때 구상하였던 육영사업의 하나로 1935년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을 설립하여 민족 사업에 기여하였다.

병천사는 크기가 사우라기보다는 서원에 가까울 정도로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병천사는 1919년 이후 광주 지역의 선비였던 지응현과 유지들이 '천리를 병집한다'는 의미의 병천사라는 이름을 짓고, 금호동에 넓은 사당을 세우고, 민족을 위하여 공헌한 호국선현들 중에서 정몽주를 비롯한 총 5명의 선인들을 배향하여 그분들의 정신을 함양하고 계승하고 있다. 병천사는 서원으로 느낄 정도로 규모가 큰 사당 건물이다. 1979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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