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45
한자 光州民主化運動-尹祥源
영어공식명칭 Light of May18 Democratic Uprising, Yun Sangwon
이칭/별칭 윤개원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우

[정의]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며 항쟁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5·18민주유공자.

[개설]

윤상원(尹祥源)[본명 윤개원(尹開源)]은 노동운동가이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 역할을 맡는 등 열흘간의 항쟁 전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하여 1981년에 작곡된 민중가요이다.

[1980년 이전, 들불야학]

윤상원은 1950년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마을[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의 농촌에서 아버지 윤석동과 어머니 김인숙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윤상원은 1학년을 마치고 일찍 군에 입대한 후 1975년 다시 복학하였다. 윤상원은 많은 형제의 장남으로 집안 형편을 생각해 처음에는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살이를 한 선배 김상윤을 만난 1975년에 사회과학 공부에 눈을 뜬다.

1976년 4월, 4.19혁명 16주년을 맞아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선동문을 남동생 윤정원, 여동생 윤현희와 밤새워 필사하여 교내에 살포하였다. 같은 해, 김상윤을 통해 민청학련 관련자인 이강, 윤한봉, 윤강옥 등과의 만남을 가졌다. 윤상원의 학교 앞 자취방을 거점으로 삼아 다양한 학습 모임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 모임에는 조봉훈, 신일섭, 박몽구, 김금혜, 박현옥, 안길정 등이 참여하였다. 후일 영혼결혼식을 치른 박기순과도 이때 만났다고 한다. 이 무렵 윤상원은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광주 지역 진보적 활동가들의 거점이던 녹두서점에서 소그룹 활동에 참여하며 사회과학적 소양을 갖춰 나갔다.

1977년 12월, 광주YMCA에서 마련한 '민족극 교실'에 참여하여 전통극의 이론과 탈춤을 배웠다. 여기에서 광주 지역 문화운동의 1세대를 이루는 윤만식, 조길예, 정오현, 김정희, 김윤기, 김선출 등을 만났다. 당시 판소리에도 관심을 가지고 서울의 연극연출가 임진택이 만들고 불렀던 현대판 판소리 「소리내력」 테이프를 구해 자주 연습하였다.

윤상원은 1977년 대학교 4학년이 됐을 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부모와 형제를 생각하면 장남으로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았다. 고민 끝에 졸업을 앞둔 1978년 1월 주택은행[지금의 케이비국민은행] 입사 시험을 보고 합격해 서울의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받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장을 다니고 있던 1978년 6월, 전남대학교에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및 '6.29학원민주화시위'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배망을 뚫고 찾아온 6.29학원민주화시위 사건 관련자인 조봉훈, 김윤기, 김선출, 박몽구 등을 통해 광주의 실상을 상세히 들은 윤상원은 반년 만인 1978년 7월에 사직서를 내고 광주에 돌아오게 된다. 이후 김상윤이 운영하는 녹두서점의 일을 도우며 향후 진로를 모색하였다.

1978년 10월, 광천공단[지금의 광천종합버스터미널 부근] 내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노동 현실을 체험하기 위해 일용직 노동자로 취업하였다. 그즈음 들불야학박기순, 최기혁으로부터 들불야학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1월에 광천동 시민아파트 사글셋방에 입주하여 들불 야학생 백재인과 공동 생활하였는데, 야학 강학들과 학생에게 개방한 윤상원의 방은 교무실이자 자료실로 기능을 하였다. 12월 에 광주 최대의 재래시장에 있는 광주양동신용협동조합에 취업한 윤상원은 학생운동 지도부가 참여하는 '광천공단 노동자 실태조사팀'을 구성하였다. 여기에는 이세천, 장석웅, 박병기, 안진, 김정희, 박관현 등이 참여하였다. 이때가 윤상원박관현의 첫 만남이었다고 한다.

1979년 5월, 주민운동의 일환으로 김영철, 박용준과 함께 야학 인근의 광천동 시민아파트 청년들인 박용규, 서동주 등과 함께 학습 모임을 진행하였다. 윤상원들불야학전남대학교 당국과 정보사찰 당국[경찰과 중앙정보부]으로부터 폐교 압박을 계속 받자, 이에 대응하는 일에 박관현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박관현박효선이 참여하게 된다. 10.26사태 이후 비상계엄하에서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 주최로 실시하는 대통령 선거 반대운동 분위기에 동조해 전남대학교 11.30시위를 주도하였다. 표면상으로는 전용호, 김정호가 주도하였으나, 윤상원이 시위 선언문을 작성하고 박용준이 등사했다고 한다. 1980년 초 서울의 이태복과 만남을 지속하던 윤상원은 전국 단위 비공개 반합법 노동운동단체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1980년 4월 30일 경기도 인천시 북구[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서 3박4일의 일정으로 열린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 집회에 참석하여 광주·전남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항쟁 속 시민군의 대변인]

윤상원은 1980년 5월, 재야민주세력의 결집체였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조직 개편 및 확대 움직임에 따라 전남지부 결성을 앞두고 실무자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지부 결성은 5.17계엄지역 확대 조치로 무산되었다.

5월 14일~5월 16일, 박관현이 주도한 전라남도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광주 지역 민족민주화 성회에 참석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된 5월 18일 이른 아침 라디오 방송을 통해 '5.17계엄지역 확대 조치' 사실을 알게 된 윤상원녹두서점에서 김상집과 시위 상황을 점검하며 대책을 강구하였다. 5월 19일 윤상원은 서울 등 여타 지역에 광주의 시위 상황을 알렸다. 윤상원은 시위 투쟁의 조직적 홍보를 위해 오전 중 들불야학의 정재호, 서대석 등의 강학들과 광천동 야학 보유 등사기로 시위 전단 작업을 시작하였다.

5월 20일 오전, 선언문 혹은 격문 형태의 다양한 전단을 제작하여 시위 현장에 살포하였다. 오후에 박효선 등과 계림동 시위 현장에 참여한 후에 대시민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근처의 인쇄소에서 두 종류의 유인물을 제작하여 시가지에 살포하였다. 5월 20일 저녁, 들불야학에 전단 작업을 계속할 것을 지시하고 시가지 투쟁 현장에 합세하였다.

5월 21일 오전, 심야 시위에 이어 계속된 시가지 시위 현장에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 등을 제작 살포하였다. 녹두서점에서 김상집, 박효선, 정상용, 이양현, 정해직, 윤강옥 등과 투쟁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정오 무렵, 전용호와 함께 광천동 들불야학으로 돌아와 시민 투쟁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투사회보'의 제작을 통해 투쟁을 조직적으로 지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5월 21일 오후에 '투사회보' 1호가 제작 배포되었다.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시민의 자위적 무장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5월 22일 오전, 녹두서점을 거점으로 박효선, 김영철, 김상집 등과 함께 항쟁에의 적극적 참여를 결의하는 등의 대책회의을 가졌다. 윤강옥, 박효선 등과 함께 시민군이 장악한 도청 청사에 들어가 학생대표 김창길을 만나 투쟁 의지를 전달하였다. 5월 22일 오후에는 박효선, 윤강옥, 김상집 등과 함께 '매일 궐기대회 개최, 대시민 홍보 강화, 운동세력 규합, 그 후 도청의 시민군 참여' 등을 논의하였다. 이 무렵 박효선 중심의 마당극단 광대의 김윤기, 김태종, 최인선 등이 항쟁에 조직적으로 가세하게 된다

5월 23일 오후 2시경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를 앞두고 오전부터 활발한 대시민 홍보 작업을 진행하였다. 5월 23일 저녁 무렵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 당시 피신하였던 정상용, 이양현이 투쟁 대열에 가세하는 등 다수가 모여 '궐기대회 지속 개최, 재야인사 접촉, 청년학생운동세력 조직화, 도청 입성' 등에 관해 논의하였다.

5월 24일 오전, 투사회보 제작팀이 광천동에서 광주YWCA로 이동하여 도청을 출입하며 수습위원회와 토론하고 시민군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저녁때쯤 광주YWCA에서 있었던 궐기대회 평가회의를 통해 조직적인 부서 편성, 차후 대책를 논의하였다.

5월 25일 오전, 무기 수거 및 반납 주장이 팽배한 상황에서 윤상원은 무기 반납 주장에 반대하며 도청 내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저녁 무렵, 도청 무기 반납을 위한 학생 수습위원회 회의장에 들어가 무기 반납 불가를 역설하였다. 저녁 8시경, 광주YWCA 대학생 집결소에 모인 100여 명의 대학생들을 도청으로 인솔하였으며, 이날 밤 무장경비 등에 배치시켰다. 저녁 10시경에는 정상용, 김영철, 김종배, 허규정 등과 도청 3층 식산국장실에서 회합하고 시민학생투쟁위원회[위원장 김종배]를 결성하였는데, 윤상원은 자청해서 대변인을 맡았다.

5월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시 외곽에서 탱크를 몰고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수습위원들은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저지하려고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 이들은 "시내로 진입해 오려거든 차라리 우리를 먼저 깔아 죽이고 들어오라."며 도로 위에 드러누웠다. 기세에 눌려 계엄군이 일단은 돌아갔다. 수습위원회는 마지막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상무충정작전[광주 재진입 작전]' 추진을 결정한 계엄 당국은 협상을 거부하였다. 오후 3시경, 윤상원은 도청 홍보실에서 대변인 자격으로 공식적으로 10여 명의 외신기자가 참여한 가운데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미국의 일간지 『볼티모어 선(The Baltimore Sun)』의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 기자는 윤상원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분명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내 마음 속에 그릴 수 있는 단 한 명의 희생자가 있다. 그는 바로 5월 26일 외신기자회견을 열었던 시민군 대변인이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 무렵 항쟁 지도부도 시민군을 재편해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하는 등 최후 항전을 준비하였다. 두려움 때문에 총을 버리고 개별적으로 이탈하는 사람이 생겨났지만, 윤상원은 "굳은 각오가 아니면 지금 상황을 헤쳐나가기가 어렵다. 굳은 각오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라며 붙잡지 않았다. 밤이 다가오자 계엄군의 출동을 알리는 시민의 제보 전화가 몇 차례 걸려 왔다. 자정에 광주 시내의 모든 전화가 끊겼다. 결전을 앞둔 시민군은 무기를 받으려고 도청 앞뜰 무기고로 모였다. 이 자리에서 윤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전두환 살인집단에게 도청을 내준다면 우리는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5월 27일 새벽 3시경, 윤상원광주YWCA에서 무기를 배급받기 위해 온 들불야학의 나명관, 신병관 등과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이후 계엄군 공수부대가 도청 주변으로 포진, 1차 집중 발포가 있었다. 윤상원은 이양현, 김영철 등 다수의 시민군과 도청 민원봉사실 2층에 있는 도청 회의실에 들어가 노동청 방면의 창틀에서 방어를 하였다. 새벽 4시경, 윤상원은 이양현, 김영철과 "저 세상 가서도 이렇게 동지애를 나누자."는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새벽 4시가 넘어 여명이 서서히 밝아올 무렵, 도청 뒷담을 넘은 공수부대원들의 집중 사격으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사망 추정]. 도청 회의실 중앙에 이불을 깔고 안치되었는데, 이날 외신기자 명함을 소지한 성명불상자로 처리되어 상반신이 불탄 채 시신이 공개되었다.

[기억과 추모]

5월 28일 시청 청소차로 운송되어 망월묘지공원에 '관번호 57, 검안번호 4-1, 묘지번호 111'을 달고 성명불상자로 가매장되었다가, 6월 22일 가족들의 시신 확인 후 정식 매장되었다. 그 뒤 대학시절 친구들의 도움으로 '해파파평윤공개원지묘 일명 상원'이란 묘비가 세워졌다[5.18구묘지].

1982년 2월 20일, 들불야학 시절 먼저 세상을 떠났던 박기순과의 영혼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극이 '넋풀이-빛의 결혼식'이고, 황석영이 작사하고 김종률이 작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극 마지막 부분에 함께 불렀던 민중가요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동식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해 조악한 상태로 녹음되었지만 전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1989년 전남사회문제연구소에서 윤상원의 일대기 간행 준비에 들어갔으며, 1990년 윤상원의 선후배들이 '윤상원상위원회'를 결성하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윤상원상'을 제정, 몇 차례 시행되었다가 이후 들불기념사업으로 통합되었다. 1991년 5월, 『윤상원 평전-들불의 초상』이 풀빛에서 발행되었다.

199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되면서 윤상원은 영혼결혼식을 치른 박기순과 합장 형태로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2003년 6월에는 모교인 전남대학교가 선정한 용봉인 영예대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겨울, 화재로 윤상원 생가가 소실되자 윤상원 생가 복원 추진모임이 구성되어 생가를 복원하고, 그곳에 '윤상원열사추모관'을 만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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