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펼친 기대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43
한자 退溪-四端七情論爭-奇大升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영수

[정의]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이황(李滉)[1501-1570)과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그리고 리(理)와 기(氣)의 관계에 대해 벌인 조선유학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철학논쟁.

[개설]

사단칠정 논쟁이 시작된 역사적 배경은 정지운의 「천명도」와 관련되어 있다. 정지운은 김안국(金安國)[1478~1543)과 김정국(金正國)[1485~1541)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정지운은 1537년 『성리대전』에 있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요약하고 종합하여 『천명도설』을 지었다. 이후 정지운의 『천명도설』은 세상에 널리 유포되어 이황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황은 정지운을 만나 논의 끝에 『천명도설』의 문구를 수정하였다. 이후 기대승이황이 수정한 「천명도」를 보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반론을 제기하였다[1559]. 기대승이황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1566까지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다.

기대승이황과 8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칠정[희, 노, 애, 구, 애, 오, 욕)의 관계를 이(理)와 기(氣) 개념을 통해 재규정하면서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다. 이황은 정지운(鄭之雲)[1509~1561]의 「천명도」의 내용을 수정하면서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라 주장했다. 기대승이황이 수정한 「천명도」의 내용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단과 칠정을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칠정은 정(情)의 전체적인 측면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사단은 그 정(情) 가운데 선한 것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반론을 제기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사단칠정 논쟁은 기대승이황의 사단칠정 논쟁 이후 많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조선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단칠정 논쟁의 진행 과정]

정지운은 1537년에 『천명도설』을 저작하였다. 정지운은 1539년 「천명도」를 스승 김안국과 김정국에게 질정을 요청했으나 수정하지 못하였다. 이황은 1553년 「천명도」의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발현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현한다”라는 구절을 “사단(四端)은 리(理)가 발현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현한 것이다”라고 수정하였다. 1553년~1558년 동안 이황이 수정한 「천명도」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의론이 분분하게 일어났다. 1558년 기대승은 10월에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갔을 때 정지운을 만났다. 정지운은 「천명도」를 기대승에게 보여 주었다. 기대승은 「천명도」에 잘못된 부분이 많다고 평가하고 12월에 편지를 통해 이황이 수정한 「천명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황은 1559년 1월에 기대승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리(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현은 기(氣)를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천명도」의 내용을 수정하였다.

1559년 3월 기대승이황에게 사단칠정논쟁과 관련된 첫 번째 편지를 보냈다. 기대승이황의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리(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현은 기(氣)를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는 주장의 문제점에 대해 반박하였다. 기대승이황처럼 사단과 칠정을 ‘리발(理發)’과 ‘기발(氣發)’로 이해할 경우 사단은 기와 관련이 없게 되고 칠정은 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고 하며 이황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대승은 「사단칠정설」을 저술하였다.

이황은 1559년 10월에 『주자어류』에 근거하여 “사단은 리(理)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氣)의 발현이다”라는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더욱더 확고히 주장하였다. 기대승은 1560년 8월에 이황이 편지에서 자신의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펼 뿐만 아니라 강한 반박을 하자 논쟁의 논점을 다시 재정리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리와 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고, 정지운에게 편지를 써 「천명도」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황은 1560년 11월에 기대승 반박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사단은 리가 발하면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면 리가 탄다”라고 수정하였다.

기대승은 1561년 1월에 이황의 “사단은 리가 발하면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면 리가 탄다”라는 주장은 정밀하지만 여전히 칠정은 리기(理氣)를 겸하고 있지만 사단은 리만 발한다는 의미이므로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기대승은 “정이 발하는 것은 혹은 리가 움직임에 기가 갖추어지고 혹은 기가 감응하여 리가 탄다”라고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황은 1561~1566년 사이에 기대승의 반박에 대해 6개 항목에 걸쳐 답변하였다. 이황은 편리를 쓰기만 하고 부치지는 않았다.

기대승은 1566년 7월에 정(情)의 사단·칠정, 성(性)의 본연(本然)·기질(氣質)의 대비는 오류, 칠정 중에 절도에 맞는 것은 본연의 성(性)에서 나온 것과 동일함을 주장하는 「사단칠정후설」과 「사단칠정총론」을 지어 논쟁을 총정리하여 보냈다.

1577년 이황기대승이 보낸 「사단칠정후설」과 「사단칠정총론」의 내용이 훌륭하다고 평가하였다.

[사단칠정 논쟁의 의의와 평가]

기대승이황의 사단칠정 논쟁은 기본적인 입장 차이가 논쟁의 과정에서 좁혀진 것도 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이 많았다. 이황은 시종일관 사단과 칠정을 '리발(理發)'과 '기발(氣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리(理)와 기(氣)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고 "정(情)이 발함에 리(理)가 움직여 기(氣)가 갖추어지기도 하고, 기(氣)가 감동하여 리(理)가 타기도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이(李珥)[1536~1584]는 1572년 성혼(成渾)[1535~1598]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대승이황의 사단칠정 논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황기대승과 사단칠정을 논한 것이 무려 수만을 헤아릴 수 있지만, 기대승의 이론은 분명하고 똑바로 갈라져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고, 이황은 변설이 비록 상세하나 이치가 밝지 않아 반복하여 음미하여도 마침내 틀림없이 확실한 점을 찾아볼 수 없다."

기대승이황의 사단칠정 논쟁은 성리학의 자생적 발전과 심화를 주도하였던 논쟁이다. 사단칠정 논쟁은 성리학의 심성론(心性論)과 리기론(理氣論)의 결합을 시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근본 개념인 사단과 칠정이 심도 있게 재규정되었다. 사단칠정 논쟁은 이후 조선유학사에 있어서 많은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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