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리 운수노조원 파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94
한자 松汀里運輸勞組員罷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일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6년 6월연표보기 - 송정리 운수노조원 파업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26년 10월연표보기 - 송정리 운수노조원 파업 종결
발생|시작 장소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면 송정리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오영|이은규|주광우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 운수노동조합원들이 노동권을 확보하고 지키는 과정에서 있었던 노동 쟁의.

[개설]

1926년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면 송정리[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운수노동조합 노조원들이 정당한 노동권을 확보하고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벌였던 파업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전라남도 광주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위한 전라남도 행정과 경찰 지배의 거점이었다. 그런 특성으로 초반에는 인쇄업, 운수업 등이 약간 활성화된 정도였다. 1920년대 노동자 단체의 출현과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고 일제의 식민 지배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노동자들의 사회적·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1920년대 초반부터 민족운동의 한 범주로 전개되었다.

당시 전라남도 광주 송정역 주변에는 호남선과 전남선이 개통된 후, 수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지만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가 없었다. 그래서 1925년 9월 송정리역 권역의 운수노동자[운수노동자와 운반부, 하차부, 우마차부], 정미 기타 노동자, 신사(紳士) 자본가, 상업가(商業家) 관리 등이 연합한 송정리 친의계(親誼稧)가 조직되었다.

[경과]

송정리 친의계의 조직 목적은 상호부조를 위한 것으로 계원 및 가족이 사망할 때 부조금 20원 혹은 10원씩을 주는 것이었다. 여기에 매월 연금 40전씩을 받아서 회관을 신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지난 4~5년 동안 해당 지역의 유력가인 백운하가 노동조합을 한다는 명목으로 운송업조합 측과 노동력 공급에 대한 청부 계약을 맺은 후 노동자에게 전체 임금의 4할 이내를 주고 남은 6할 이상은 개인적으로 유용하거나 임금 전액을 횡령한 적도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1926년 6월 초부터 오영, 이은규, 주광우 등은 송정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하였고 창립 총회의 금지를 2번이나 당한 후 6월 20일에야 송영좌(松榮座)에서 150여 명의 조합원과 수백 명의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총회와 임시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친의계 측에서는 송정노동조합을 비난하고 해산을 요구하였다.

1926년 6월 25일 오후 6시 수양야학원에서 송정노동조합 측과 송정리 친의계 측이 정식 교섭을 하였다. 정식 교섭의 과정에서 친의계 측과 관련 노동자들은 송정노동조합 대표 오영을 협박하고, 부당 감금에 구타까지 했지만 친의계의 입장을 관철시키지는 못하였다. 6월 26일 오후 7시 송정노동조합 대표 오영은 긴급총회를 열어 전날의 경과 보고와 향후 대응책을 의논하였다. 보고를 들은 송정노동조합원들은 분노하여 친의계 측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의하고 그에 대한 통고문을 친의계 측에 보냈다.

통고문을 받은 친의계 측은 6월 26일 오후 10시경, 운집한 150여 명의 친의계 측 노동자들에게 송정노동조합에 물리적인 방법을 행사하여 간판과 명칭을 되찾자고 하였다. 친의계 측 노동자들은 지역 곳곳을 수색하면서 송정노동조합 대표 오영을 잡고자 하였다. 오영은 미리 몸을 피해 화를 면하였다. 당시 전남청년연맹 대표 유혁이 친의계 측 노동자들을 제재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친의계 측 노동자들은 다음날 오전 4시까지도 해산하지 않고 거리에 남아 있었다.

송정노동조합은 운송업조합 측과 직접 계약을 하였지만 친의계 측의 방해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6월 27일에는 운송조합장이 노동조합을 해산하지 않으면 종전에 사용하던 인부는 쓰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6월 28일에는 운반인, 하차부가 하던 일을 정미 노동자가 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원 150여 명은 직업을 박탈당한 꼴이 되었다. 송정노동조합 측에서는 운송업자, 친의계 등과 조정을 하고자 하였지만 노동조합을 해산하지 않으면 일할 곳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하여 양측간 감정이 격화되었다. 계속되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송정노동조합원들은 광주경찰서와 전라남도경찰부에 탄원하기 위해 5~60여 명이 광주로 갔지만 경찰의 해산 명령으로 무산되었다. 심지어 노동조합대표 오영은 선동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주재소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계속되는 친의계 측의 위협과 노동권 박탈의 문제로 송정노동조합을 해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송정노동조합 중심의 운수부와 친의계 중심의 정미부가 연합한 송정합동노조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양 세력간 불화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10월 3일 임시총회를 열었는데, 총회에서 200여 명의 조합원의 의견에 따라 이전 송정노동조합의 송정운수노동조합과 친의계 측의 송정정미조합으로 분리하기로 하였다.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백운하 일파는 10월 2일 송정철도노동조합을 내걸고, 10월 7일에는 송정역 앞에 모여 있는 운수노동조합원들에게 자신들이 지역 운송업자 및 상업가들과 노동력 청부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말하면서 차후 송정철도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노동시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송정운수노동조합원 200여 명은 크게 분개하여 백운하를 포위하여 위협하였다. 그러나 경관의 저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로 인해 송정운수노동조합원 60여 명은 소요죄로 검거되어 심문당하고, 17명은 기소되었다.

[결과]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동권을 확보하고 생존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송정운수노동조합 노동자들은 일련의 노동조합 설립 과정과 노동권 수호 과정에서 오히려 노동권 박탈이라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노동권 수호를 위해 항의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일련의 행동들은 소요죄로 검거되고, 기소되기까지 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노동조합 설립과 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고 노동자들의 사회적·경제적인 권익을 위해 앞장섰던 과정에서 있었던 노동쟁의의 한 사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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