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타이어 파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34
한자 錦湖-破業
이칭/별칭 1994년 금호타이어 파업,금호타이어 노동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신촌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94년 6월 25일연표보기 - 금호타이어 파업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94년 7월 22일연표보기 - 금호타이어 파업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94년 6월 25일 - 금호타이어 노동조합 파업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94년 6월 27일 - 노사협상 재개되었으나 진척이 이뤄지지 않음
전개 시기/일시 1994년 6월 29일 - 전라남도지방경찰청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진입
전개 시기/일시 1994년 6월 29일~7월 22일 - 금호타이어 노동조합 전남대학교에서 장외 투쟁 전개
발생|시작 장소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 광주광역시 광산구 어등대로 658[소촌동 555]|광주광역시 광산구 사암로27번길 41[신촌동 999-6]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지도보기

[정의]

1994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신촌동 일대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이 임금 및 단체협약 갱신을 위해 전개한 노동쟁의.

[개설]

금호타이어 파업은 1994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신촌동 일대 노동자들이 임금 및 단체협상을 위해 벌인 노동쟁의이다.

[역사적 배경]

1987년 이후 금호타이어에서는 임금과 단체협약 협상안이 부결되어 왔다. 부결된 임금과 단체협약 협상안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조합장의 직권조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에 반발하여 조합장이 사퇴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4년 임금과 단체협약 협상에 대해 사용자 측은 교섭위원 자격 및 징계위원회 노사 동수 참여 불가 등을 이유로 협상을 방기하였다. 또한, 노동조합 간부들이 조합원을 만나지 못하도록 현장 출입도 통제하였다. 이에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 발생 신고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다. 금호타이어 노사 갈등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경과]

1994년 6월 25일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파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사용자는 파업의 모든 절차가 불법이라며 비판하고, 헬기를 띄워 호소문을 배포하였으며, 경찰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였다. 이튿날 조합장을 비롯한 노동조합 간부 8명이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되었다. 이에 경찰은 노동조합 간부 8명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및 금호타이어 압수수색 영장을 수령하였다.

6월 27일 노사협상이 재개되었으나 진척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6월 29일 아침, 헬기 3대, 중장비 20여 대, 35개 중대 4500여 명의 병력이 1200여 명이 파업을 벌이던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으로 진입하였다. 진압에 나선 전라남도지방경찰청은 1시간 여 만에 조합원 417명을 연행하였다.

경찰에 의해 강압적으로 공장 밖으로 밀려난 노동자들은 전남대학교로 재집결하였다. 이후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약 한 달 간 전남대학교에서 장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노조는 협상 타결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사용자 측은 해고 예고 통지서 발송, 불법 노동쟁의 혐의로 노동조합 간부 21명을 고발하고, 조합원 74명 및 신원보증인 78명에게 32억 원 손해배상 청구 등을 통해 노동자를 압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금호타이어 협력업체를 비롯한 광주·전남의 경제 관련 단체들의 현장 복귀 촉구, 면학 분위기 조성을 이유로 한 전남대학교 측의 퇴거 요구 등이 이어졌다.

[결과]

1994년 7월 22일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현장 복귀를 결정하였으며, 7월 25일부터 조업을 재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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