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34
한자 張載性
영어공식명칭 Jang Jaes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장재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장재성 성진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6월 - 장재성 독서회 중앙본부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15일 - 장재성 전국민주주의민족전선결성대회 전라남도 대표 14인 중 1인으로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48년 8월 - 장재성 인민대표자대회 참석
몰년 시기/일시 1950년 7월 5일연표보기 - 장재성 사망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 56번지
거주|이주지 일본 동경시 신전구 신전 1정목 7-3번지
학교|수학지 광주고등보통학교 - 전라남도 광주
학교|수학지 중앙대학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일본대학 - 일본 도쿄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독서회중앙부 책임비서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성진회독서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학생운동가.

[개설]

장재성(張載性)[1908~1950]은 1908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 56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일제강점기 성진회(醒進會)독서회(讀書會)를 지도하고,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 조직을 이끌었다.

[활동 사항]

1926년 11월 3일 장재성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 시절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성진회에 참여하여 회계를 맡았다. 1927년 2월 4일 성진회는 모임 회원 중 한 명의 가족이 일제 형사이었기에 비밀 유지가 어려워 해체하게 되었다. 그 후 새롭게 독서회로 명칭을 바꾸어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광주공립사범학교 속에서 각각 뿌리를 내렸다. 학교별로 독서회 동지들을 규합하고 의식 확대를 도모하였는데, 장재성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직 책임자가 되었다. 1927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재성은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중앙대학(中央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1928년 6월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 이경채(李景采)가 '일본 타도'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가 제적당하는 이른바 이경채 사건이 발생하는데, 여기에 반발한 광주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투쟁을 벌였다. 이때 장재성은 방학을 이용하여 '동경유학생 모교 분규사건 대책강구회'의 특파원 자격으로 귀국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의 맹휴 투쟁을 3개월간 지도하였다.

1929년 6월 중순 장재성은 일본 도쿄에 있는 중앙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장재성은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책임비서 차재정(車載貞)을 만나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전라남도 지역 조선공산청년회의 조선공산당 재건 야체이카[세포 단체]의 구성원은 장재성 외에 장석천(張錫天), 강석원(姜錫元), 박오봉(朴五鳳), 서재익(徐在益), 나승규(羅承奎), 국채진(鞠彩鎭) 등이 참여하였다.

1929년 6월 학교별로 분산되어 있었던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학생 조직을 독서회로 개편하기 위하여 장재성은 광주 양림정(楊林町)에 위치한 양파정(楊波亭)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김상환(金相奐), 광주고등보통학교 김보섭(金普燮), 광주농업학교 조길룡(曺吉龍), 광주사범학교 송동식(宋東植) 등을 만나 독서회 중앙본부 결성을 합의하였다. 이들은 1929년 6월 중순 김기권(金基權) 집에서 동지들과 독서회 중앙본부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 독서회를 통제하는 중앙지도기관으로 독서회 중앙부 책임비서가 되어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 조직을 이끌었다.

1929년 9월 초순 장재성은 지금의 금남로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광성문구점과 빵집을 개점하여 활동 기금을 충원하고자 하였다. 1929년 10월 26일 여동생인 장매성(張梅性)의 친구이자 광주공립보통학교 동창인 박옥희와 결혼을 하였다.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소녀회(少女會)라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전라남도 나주에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기차 통학생인 박기옥(朴奇玉) 여학생을 나주 역전에서 일본인 중학생인 후쿠다 아무개[福田某]가 희롱한 사건이다. 1929년 11월 3일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광주중학교 학생들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충돌이 발생하면서 1차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장재성은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사건으로 1930년 7월 17일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공판을 받게 되었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치안유지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에 미결 구류 일수 80일 본형에 산입 판결을 내렸다. 1931년 6월 13일 1년이 지나가면서 대구복심법원은 치안유지법 위반,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의 죄를 적용하여 징역 4년에 미결 구류 일수 중 365일 본형에 산입하여 집행하였다. 1934년 4월 4월 형기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장재성은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시 신전구 신전 1정목 7-3번지에 거주하면서 일본대학 상경과를 졸업하였다. 1936년 6월에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합회를 결성하고 귀국하였다. 1939년 5월 19일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 조직 결성을 모색하다가 일제에 구속 수감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죄명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0년 초 조선일보 광주지국을 운영하였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리고 1943년부터 광복까지 2년 남짓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에서 양조장 사업을 하였다. 1945년 9월 1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제1차 개편을 단행한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조직부장에 올랐다. 이어서 광주청년동맹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민주주의민족전선결성대회(全國民主主義民族戰線結成大會)에 전라남도 대표 14인 중 1인으로 대회에 참석하였다. 1948년 8월 21일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9년 7월 2일 장재성은 이 사건으로 서울에서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게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라남도 광주시 동명동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장재성은 후퇴하는 경찰에 의해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장재성은 건국공로훈장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사회주의 경력을 문제 삼아 독립유공자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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