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동 대내마을 광산이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11
한자 雲岩洞大內-光山李氏世居地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35가구[1930년 기준]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 있는 광산 이씨 세거지.

[개설]

광산이씨는 시조에 대하여 서로 이견이 있지만, 고려 말엽의 사람으로 삼형제를 내세우고 각각 상서공파(尙書公派)[기1세조, 이순백(李珣白)], 한림공파(翰林公派)[기1세조 이숙백(李淑白)], 제학공파(提学公派)[파조 이승백(李升白)]라 하여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있다. 상서공파는 광주의 서남부인 옛 유등곡면[대촌동], 만산(萬山) 완산동을 중심으로 번진 이선제(李先齊)[1390~1353] 집안을 이른다. 한림공파는 대내마을에 세거하는 '대내이씨'들을 중심으로 한 한림공파 문중으로 광주 광산이씨 양대 산맥 중 한 파를 이루고 있다. 만산이씨들이 동인계로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삼족이 화를 입어 뿔뿔이 흩어질 때 한림공파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당색으로는 서인계에 속하는 충효동 광산김씨들과 친분을 두터이 하고 살았다.

[연원]

광산이씨 한림공파들이 광주 북쪽 나들목이라 할 황계면 대내(大內)[안팎동네]에 자리잡은 것은 고려 말엽으로 보인다. 본디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고을 토성은 고려 때 향리 집안으로 보고 있지만, 이 집안의 필문 이선제가 쓴 『경창군유서』를 보면 광주의 향리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림공파 족보에 보면 파조인 이숙백의 묘가 광주 무량동에 있고, 이숙백의 아들 이순(李順)은 풍해안렴사로 봉직하다가 광주의 옛집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4세인 이사급(李思伋)의 묘가 운림동 대내에 있어서 이때부터 황계[현재의 운암동]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5세 이세무(李世武)부터는 생졸 기록이 있다. 이세무는 1408년에 태어나 창평현령을 지내고 1492년에 죽었다. 이세무의 할아버지 이추(李楸)[1373~1442]는 광주 고을에서 조선조에 최초로 1393년(태조 2)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나온다. 이는 만산의 광주이씨 집안 이선제의 문과 급제 1419년(세종 17)보다 26년이나 앞선다.

이후 한림공파는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싸움에 종군하여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 이완근(李完根)[1545~1615], 이세환(李世環)[1541~1603,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판서 추증] 등 권율 막하 8장사 노릇을 하여 이름을 떨쳤다. 당시 황계에는 담양에 살던 해광 송제민(宋齊民)[1549~1602]이 이사와 살다가 김천일 의병군에 종사하였다. 또한 백광훈(白光勳)[1537~1582]의 형 백광안(白光顔)[1527~1567]의 아들 백추남(白樞南)[1563~1618]이 처가가 있는 황계로 이사와 살았다.

[자연환경]

황계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쓰던 견훤대가 있던 곳으로 풍수상 황계포란(黃鷄拘卵)의 형국을 하고 있는 땅이다. 주산은 북쪽 운암산[131m]이고, 동쪽으로 봉정산[87m]이 있다. 남쪽으로 광주천이 흐른다. 동네 앞으로 광주~송정선 철도가 있고, 1957년까지도 이 동네 앞에서 기차가 머물러 북광주역 또는 운암역이라 불렀다. 운암산봉정산 사이로 국도와 호남고속도로가 나 있어서 나들목이 생겼고, 동운동 고가도로가 있는 곳이다.

광주예술회관이나 광주시립미술관, 비엔날레관 등이 들어선 산이 봉정산으로 본디 황개 광산이씨들의 세장산이었다. 운암산에서 1940년 무렵 일제가 항공기와 자동차 점화 플러그로 쓰이는 운모(雲母)를 채굴하여 가져갔다. 황계포란 형국의 명당자리라 하여 진흥고등학교가 들어서고 서영대학과 산하 중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명당동이라는 운림동 산 144-1에는 이 동네 토박이인 광산이씨 이제백 등 묘지가 있다. 광산이씨의 텃자리는 황개면사무소가 있던 큰동네[대동(大洞), 대내(大內), 죽천(竹川), 안짝, 안몰]가 있던 곳이고, 수원백씨 동네는 대자(大自)이다. 이 밖에도 동배(東背), 용산(龍山) 등의 마을이 있었다. 오늘날은 산만 남기고 온통 아파트가 들어서 3개 동으로 나뉘었다.

[현황]

1910년 기록에 보면 44집 가운데 30집이, 1930년 인구조사에는 55집 가운데 35집이 광산이씨였다. 1991년 운암동은 이웃 동림동과 함께 동운동으로 부르던 시절 아파트 217동이 들어서고 인구가 6만 1993명에 달하였다. 동림동에만 20여 개 학교가 몰려 있다. 1984년 준공한 운암아파트는 149동으로 광주광역시 최대 아파트 단지이다. 이처럼 도시화되면서 옛 흔적은 운암산 기슭에 있는 광산이씨 묘지와 대자마을 수원백씨 정려비 정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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