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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23
한자 姜大直
영어음역 Gang Daejik
이칭/별칭 이온재(而溫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기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86년연표보기
몰년 1933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대표경력 독립의군부 종사관

[정의]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호는 이온재(而溫齋)이다.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경상좌수사를 역임한 물기재(勿欺齋) 강응환(姜膺煥)의 6세손이다. 1886년(고종 23)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강대직은 1914년 독립의군부 종사관의 칙지(勅旨)를 받고, 이때부터 비밀 결사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했는데, 3·1운동 직후 대한독립애국단원 김영식(金永植)과 접선한 족제 강대선(姜大宣)의 접선책 유희영(柳熙永)을 통해 인근의 부자 유지들과 접선하여 군자금 동원에 앞장섰다. 또한 1919년 사종형 강대식(姜大湜)과 함께 암치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때는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재단 형성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고창고등보통학교 인가가 나오지 않자 전라북도 지사를 방문하여, 항일 운동도 아닌 청소년들의 교육 시설을 인가 받고자 하는 일인데 도지사가 이를 반대한다면 고창군민 대표단을 인솔하고 사이토 총독을 찾아가 일본이 조선을 합방한 목적과 이유를 규명해야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재가를 얻어 낸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강대직은 지성인이기도 했지만 매사에 박력 있는 성품을 가진 명연설가로 유명해서, 당시 일본인들도 그의 인품에 매료될 정도로 고창군민의 당당한 지도자였다. 강대직의 가문에서 교육을 위해 지은 열운정(悅雲亭)을 다시 지어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다가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다.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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