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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락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94
한자 白樂宗
영어음역 Baek Rakjong
이칭/별칭 백종호(白宗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920년연표보기
활동 1939년연표보기
활동 1941년연표보기
활동 1943년연표보기
활동 1958년연표보기
활동 1983년연표보기
활동 1988년연표보기
활동 1989년연표보기
몰년 2003년연표보기
출생지 대구시 중구 인교동
성격 미술가
성별
대표 경력 대구화우회 조직|향토회 조직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미술가.

[활동 사항]

백락종(白樂宗)은 1920년 10월 26일 대구시 중구 인교동에서 백기상의 6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백종호(白宗鎬)라고도 불렀다. 대구 수창소학교와 서울 대동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혼자 유화를 익혔다고 한다. 이후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중국 심양(瀋陽)을 방문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39년 경상북도 경주군에 있는 건천금융조합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21세 되던 해인 1941년 일본 도쿄 시나가와사진학교 본과를 수료하고 귀국했다.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주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다가 화가 관성 김준식과 지홍(智弘) 박봉수(朴奉洙), 조소가 월성 김만술과 교류하면서 4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1943년 일제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달성군청에 취직했지만 노무자 징발령으로 퇴직당하고 징발될 위기에서 경상남도청의 고급 관리였던 김덕기 국장의 도움을 받고 통영군 광도면사무소에 취직하였다.

해방 후 백락종은 대구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정점식·김우조 등과 대구화우회를 만들어 향토에 대한 애정과 정서가 담긴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보도연맹사가 주최한 전국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서울의 대원화랑에서 1회, 대구의 미국문화원에서 2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이효상·이호우 등 문화·예술인 중심의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였다. 1958년 백태호·민영식·나재수 등과 황토회를 만들어서 활동하였다.

1988년에는 한일친선 한국현대작가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1983년에는 프랑스 파리미술협회가 주관하는 A.D.A.G.P 초대전에 참가하였다.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던 백락종은 70세가 되던 해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로 이사하였다. 이후 황토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백락종은 1970년대 초반 마포 캔버스를 개량하여 우리 정서에 잘 맞고 내구성이 우수한 한지 캔버스를 개발했으며, 나아가 그 바탕 위에 동양화 고유의 먹을 첨가하여 자기 고유의 마티에르[재질에 익숙해지고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를 창안했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된 마티에르 위에 서양화 고유의 유화 물감으로 동양화 기법을 융합하여 새로운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이는 곳 한지와 먹, 그 위에 유화 물감이란 동양화와 서양화의 재료적 혼합이고, 기존의 회화 장르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깬 것이었다.

[저술 및 작품]

백락종은 서민들의 삶에서 추구되는 염원을 그림의 소재들로 표현했는데, 「생(生)」·「토(土)」·「무(無)」·「청정(淸淨)」·「정토(淨土)」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상징성이 강한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확실히 하였다. 대구 효성여자중학교와 효성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14년간 근무하면서 월간 『신태양』과 『학원』, 일간지인 『영남일보』와 『매일신문』 등에 삽화를 연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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