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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3977
한자 許蘭雪軒
영어음역 Heo Nanseolheon
이칭/별칭 초희(楚姬),경번(景樊),난설헌(蘭雪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장정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인
아버지 허엽
어머니 강릉김씨
허성|허봉
아우 허균
남편 김성립
출신지 강릉
성별
생년 1563년연표보기
몰년 1589년연표보기
본관 양천
초명 초희

[정의]

조선 중기의 강릉에서 태어난 여성 시인.

[개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의 강릉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초당 허엽(許曄)의 딸, 허성(許筬)허봉(許篈)의 동생이고 허균(許筠)의 누이이다. 강릉 교산 애일당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세 무렵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시집살이와 남편의 외방 출입으로 원만한 부부관계가 되지 못하였다. 허난설헌은 사랑하던 남매를 잃고 복중의 아이마저 유산하자 큰 슬픔에 빠졌다. 친정의 몰락, 오빠와 동생의 귀양 등 가문의 비극이 겹치고 허약한 육신과 정신적 피폐함 등으로 인하여 27세로 요절하였다.

[가계]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재상이었던 문경공 허공(許珙)의 혈통을 이어받아 선조 때 명망이 높았던 초당공 허엽을 아버지로, 예조참판을 역임한 애일당 김광철(金光轍)의 따님인 김씨를 어머니로 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청주한씨 부인에게서 딸 둘과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장녀는 박순원에게 차녀는 우성전에게 시집을 갔고, 장남은 이조판서를 역임한 악록 허성(許筬)이다. 한씨부인과 사별 후 강릉김씨 부인과 재혼하여 하곡 허봉(許篈)허난설헌, 허균(許筠)이 태어났다.

[생애]

허균이 쓴 『학산초담(鶴山樵談)』[1593]에 의하면 “난설헌의 이름은 초희이고, 자는 경번이니, 초당 허엽의 딸이며, 서당 김성립의 아내이다.”라고 밝혔다. 그녀의 호 난설은 대체로 여성의 미덕을 찬미하는 난혜지질(蘭蕙之質)에서 따왔고, ‘설’은 진나라 사씨의 딸이 시를 짓는데 눈을 버들개지에 비유한 고사에서 뛰어난 글재주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고결하고도 글재주가 탁월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초희’라는 이름 역시 미녀이고 재주 있는 여성을 뜻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만중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 의하면 “난설헌의 다른 호인 경번당은 대체로 번부인(樊夫人) 부부가 모두 신선이 된 것을 흠모한 것이다”라 하였고, 임상원(任相元)의 『교거쇄편(郊居瑣編)』에는 “난설헌은 『태평광기』를 즐겨 읽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외웠으며, 중국 초나라 번희를 사모했기 때문에 또한 호를 경번이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경번’을 자가 아닌 호로 잘못 보았다.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살다가 7세 무렵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허엽허난설헌이 5세 때 대사성이 되었고, 6세 때 진하사로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왔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글재주를 보인 허난설헌은 여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쓴 8세 이후부터 15세에 결혼하기 전까지 집에서 열정적으로 시공부를 하였다.

허난설헌이 10세 때 오빠 허봉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휴가를 받는 사가독서를 하였으므로 오빠에게 글을 배웠고,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허균도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배운 것”이라 하였고, 특히 “누님은 참으로 하늘 선녀의 글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 허균은 『난설헌집』 발문에서 “자녀가 없다 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대단히 저작이 많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다.

허난설헌은 시 「강남곡」에서 “어찌 알았으리 나이 열다섯 살에 조롱받는 사내에게 시집갈 줄이야”라고 자신의 처지를 빗대었다. 허균이 누이의 요절에 대하여 애통함을 표현한 「훼벽사」에는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또 두 아이를 잃었으므로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언제나 누님을 생각하면 가슴 아픔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학산초담」에는 허난설헌의 죽음을 예감한 시참(詩讖)이 들어 있다. “누님도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시를 지었다. ‘푸른 바다는 구슬바다에 젖고(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기대네(靑鸞倚彩鸞)/ 스물일곱 송이 아름다운 연꽃(芙蓉三九朶)/ 달밤 찬서리에 붉게 떨어졌네(紅墮月霜寒)’ 그 이듬해 세상을 마쳤으니 삼구는 이십칠이라. 누님이 세상에서 누린 햇수와 꼭 같다. 사람의 일은 이미 전에 정해져 있으니, 커다란 운수를 어찌 벗어날 수 있으리오?” 또한 허균은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를 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며 애통한 마음을 표현했다.

[학문과 사상]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 당대의 악부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상적으로는 도교의 신선관이 중심이라고 하겠다. 그의 작품에는 도교의 신선세계, 궁중, 변방, 가정사가 중심이 되고 있다. 특히 「유선사(遊仙詞)」 87수는 선계를 동경하고 있어 유교적 질서가 중시되던 조선조 사회에서 정신적 휴식처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궁중사를 읊은 시가 20수로 궁인들을 통해 자아를 투영했으며, 변방의 수자리를 주제로 한 시가 18수로 자신의 고통과 변방으로 임을 보낸 여성의 심정을 일체화 하였다.

허난설헌의 시에는 슬픔공감어가 192회에나 사용되고, 패물이 316회, 기타 자연물에서는 구름이 46회, 새가 98회로 비상하고픈 심정이나 여성적 미의 추구, 한의 정서 등이 특별히 시어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결과론이기는 하나 허난설헌은 비통한 자신의 삶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해부하여 시로 승화시킨 탁월한 시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술]

1608년 목판본으로 나온 『난설헌집』은 동생 허균이 누이 허난설헌 사후에 흩어진 시들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작품]

허난설헌의 시는 213수이며, 그 가운데 자전적인 시는 「견흥(遣興: 흥에 이끌려)」이다. 이 시에서 오동나무와 자신을 대비하여 한 많은 자신의 생애를 표출하였다. 이 시는 허난설헌이 훌륭한 악기가 된 것은 오빠나 스승과 같은 장인을 만난 것과 같고, 이로써 후세에 이름을 전해질 것으로 보았으나, 자식도 사별한 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당시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크게 낙담하고 있어 죽음을 예시한 것으로 보인다. “역양산에서 자란 오동나무/ 몇해나 추운 비바람 견디었나/ 다행히 이름난 악공을 만나/ 베어져서 거문고로 만들어졌네/ 그 거문고로 한 곡조 탔건만/ 세상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네/ 그러므로 광릉산 거문고 곡조도/ 끝내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묘소]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있다.

[의의와 평가]

허난설헌은 글재주가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나 천부적인 재주와 출중한 용모로 여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부적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 악부시와 유사함, 집안의 몰락 등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는 규원의 한을 품고 살면서도 현실초월의 신선세계를 그려나감으로써 ‘하늘 선녀의 글재주’, ‘시와 문장은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유작 한시의 양적·질적인 면에서 동양 삼국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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