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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3726
한자 八景
영어음역 palgyeong
영어의미역 eight scenic views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이한길

[정의]

산수 중에서 대표적인 8가지 명승지를 일컫는 말.

[개설]

본시 경치는 보는 사람이 한 번 보면 끝나는 일회성 시공의 영역에 속하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팔경으로 통칭되는 4자성어로 만들어져 인구에 회자되면서부터는 지향하는 바가 확대되어 나타난다.

[역사와 변천]

수용자는 실제 경험하지 않고도 관념적으로 체험한 것처럼 느끼는 추체험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동정추월(洞庭秋月)’이라고 하면 동정호의 아름다운 가을달을 떠올릴 것이다. 분명히 보는 사람은 한 순간의 경치를 즐기겠지만, 동정추월이란 단어로써 환기되는 관념은 동정호를 실제 체험하지 않고도 다양하게 관념화시킬 수 있다. 이럴 경우 실제의 모습과는 달리 부분적 확대와 축소 등 강조하는 바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부분에 시적 화자의 소망하는 바가 투영될 수 있으니 이른바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동정추월은 소상팔경 중의 한 경치이다. 소상(瀟湘)은 중국 동정호 근처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의미한다. 팔경의 원조격인 소상팔경은 소수와 상수 근처의 아름다운 경치를 8개로 읊은 것이다. 평사낙안(平沙落雁), 원포귀범(遠浦歸帆), 산시청람(山市晴嵐), 강천모설(江天慕雪), 동정추월(洞庭秋月), 소상야우(瀟湘夜雨), 연사만종(煙寺晩鍾), 어촌석조(漁村夕照) 등이 그것이다.

송의 소식(蘇軾)은 송적(宋迪)이 그린 「소상팔경도」를 보고 화제(畵題)에 따라 시를 지었는데 이로부터 차운이 성행하면서 비로소 팔경문학이 탄생하였다. 소상팔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시대인데, 고려 명종은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시를 지어 올리게 하니 이인로(李仁老)진화(陳澕) 등이 그 시의를 본떠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아마도 최초의 기록일 것으로 김동욱은 추정했다.

팔경(八景)과 더불어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것이 구곡(九曲)이다. 대표적인 구곡을 읊은 작품으로는 주자의 「무이도가」와 「무이도가」의 시의(詩意)를 계승한 율곡의 「고산구곡가」가 있다. 영동 지방에도 명승을 읊은 작품들은 많았지만 이런 팔경구곡의 개념을 받아들여 관동팔경으로 구체화한 것으로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언급은 미수 허목[1595-1682]의 「죽서루기」가 아닐까 짐작한다.

혹자는 고려조 안축이 지은 「관동별곡」에서 관동팔경을 언급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작품을 보면, 두 번째 연만 보아도 학성 동쪽[안변]의 원수대와 천도섬, 국도섬, 3연에서 총석정, 금난굴의 기암괴석, 전도암과 사선봉의 옛 비석, 아야발의 바위돌 등 많은 경치를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아홉 개의 연을 언급하니 얼마나 많은 명승지를 언급하고 있는지 추산할 수 있을 것이다.

명승은 많되 이를 추려내는 기술은 아직은 부족하다. 이를 본격적으로 추려내는 것은 조선조이지만, 고려조 김극기가 이미 강릉의 팔영을 읊은 바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초는 고려시대로 앞당겨질 듯싶다. 김극기가 읊은 강릉팔영(八詠)은 녹균루(綠筠樓), 한송정(寒松亭), 경포대(鏡浦臺), 굴산종(崛山鐘), 안신계(安神溪), 불화루(佛華樓), 문수당(文殊堂), 견조도(堅造島)이다. 견조도는 지금의 안목 바닷가에 있는 육지와 붙은 섬이고, 굴산종은 굴산사의 종소리를 의미하고, 녹균루는 녹두정으로 추정된다.

조선조에 와서 팔경을 처음 추려낸 것으로 보여지는 허목의 「죽서루기」를 보면 미수 허목은 8경으로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간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정을 들었다. 그런데 이 팔경을 보면 오늘날 통칭되는 1군(郡) 1경(景)의 원칙에 어긋나 고성은 2개의 명승을 들고 있는데, 1군1경의 원칙이 나름대로 지켜진 것은 숙종대왕으로부터 비롯한다.

숙종[1661-1720]은 도화서 화원에게 지시하여 관동의 명승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팔경을 추려내었는데, 숙종이 추려낸 8경은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만경대,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 등이다. 이중 강릉 경포대를 읊은 한시는 다음과 같다.

汀蘭岸芝繞西東(정란안지요서동) [물가의 난초지초 동서로 잇고]

十里煙霞映水中(십리연하영수중) [십리에 걸친 경치 물속도 보여]

朝噎夕陰千萬像(조일석음천만상) [동트고 해 지면서 수많은 모습]

臨風把酒興無窮(림풍파주흥무궁) [바람결에 잔 드니 흥만 저절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팔경으로 월송정을 빼고 흡곡의 시중대를 넣었으며, 또 간성의 만경대 대신에 청간정을 넣었고, 양양은 청초호를 넣었다. 이후 정조대왕[1752-1800] 역시 관동팔경을 추려내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를 보면 관동팔경을 읊은 시가 있는데, 이 시 표제에 ‘어떤 사람이 금강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관동을 그린 병풍을 보여주기에 그 병풍에 글을 써주어 돌려주었다[有人自楓嶽歸. 以關東圖屛示余. 書其屛以還]’라고 하여 이 시를 짓게 된 연유도 아울러 설명해놓았다. 정조대왕이 언급한 관동팔경은 숙종대왕의 관동팔경과 동일했다. 다음은 정조대왕강릉 경포대 한시다.

江南小雨夕嵐暗(강남소우석람암) [강남땅 보슬비에 해 지자 이내]

鏡水如綾極望平(경수여능극망평) [비단물결 경포호 끝이 없구나]

十里海棠春欲晩(십리해당춘욕만) [십리에 핀 해당화 봄은 저물고]

半天飛過白鷗聲(반천비과백구성) [해 저문 하늘 위엔 갈매기 소리]

오늘날 관동팔경이라 하면 숙종대왕정조대왕이 언급한 팔경에서 간성의 만경대 대신에 이중환이 언급한 청간정을 집어넣는다.

이와 같은 팔경의 개념을 빌려와 강릉에서도 팔경이 있고, 경포대에도 팔경이 있고, 경치가 좋은 곳이면 어디든지 팔경이 있다.

조선 정조 때 강릉부사를 역임한 홍의호는 임영[강릉의 옛 이름]팔경으로 만리창해(萬里蒼海), 오대영악(五臺靈嶽), 경호명월(鏡湖明月), 한송백사(寒松白沙), 학동심진(鶴洞尋眞), 용연청폭(龍淵聽瀑), 남천타어(南川打魚), 북평관가(北坪觀稼) 등을 꼽았다. 만리창해는 동해의 검푸른 바다를 의미하고, 오대영악은 오대산국립공원 일대를 의미한다. 경호명월은 경포호의 맑은 달이고, 한송백사는 한송정이 있는 바닷가의 은빛모래톱을 지칭하고, 학동심진은 청학동, 즉 오늘날의 오대산 소금강 깊은 골짜기를 의미하고, 용연청폭은 사천면 용연사 근처의 시냇물과 폭포를 의미하며, 남천타어는 남대천에서의 고기잡이이고, 북평관가는 북평땅, 즉 오늘날의 오죽헌 근처의 늘어선 민가들을 의미한다.

경포팔경은 녹두일출(菉荳日出), 죽도명월(竹島明月), 『강문어화(江門漁火)』, 초당취연(草堂炊煙), 홍장야우(紅粧夜雨), 증봉낙조(甑峰落照), 환선취적(喚仙吹笛), 한송모종(寒松暮鐘) 등이다. 녹두일출은 녹두정[일설에는 한송정이라고도 함]에 올라 보는 해돋이고, 죽도명월은 죽도[강릉에는 죽도가 두 곳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죽도는 아마도 현재 현대경포대호텔이 들어선 지역을 이른다.]에서 바라보는 달맞이고, 강문어화는 강문동 항구에 불 밝혀진 모습이다. 아마도 청어나 오징어잡이를 나가기 위해 항구에 불빛이 가득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초당취연은 초당의 민가에 올라오는 밥 짓는 연기이며, 홍장야우는 여말선초의 기생 홍장의 사랑을 소재로 한 것으로 홍장암이란 바위의 비 오는 저녁풍경을 의미한다. 증봉낙조는 시루봉의 저녁놀이며, 환선취적은 환선봉의 피리소리이고, 한송모종은 한송사의 저녁종소리이다.

그밖에도 『한객건연집』에는 안인팔경(安仁八景)이, 『동호승람(東湖勝覽)』에는 시호팔경(詩湖八景)과 향호팔경(香湖八景), 『임영문화(臨瀛文化)』[3집]에는 모산팔경(母山八景)과 강동팔경(江東八景) 등이 전한다. 안인팔경은 강동면 안인리 근처를 의미하고, 시호팔경은 강동면 하시동 근처에 있고, 향호팔경은 주문진읍 향호리 근처에 있고, 모산팔경은 모산동 근처에 있고, 강동팔경은 강동면 전체를 지칭한다. 오늘날 ‘강릉팔경’으로 강릉시에서 꼽고 있는 것은 오죽헌, 경포대, 강릉단오제, 소금강, 정동진역 해돋이, 선교장, 대관령 자연휴양림, 경포도립공원 등이다.

이상에서 예시한 것처럼 강릉 근처는 절경이 많아 팔경이 예로부터 유행하였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경치는 강릉으로 하여금 예로부터 문향(文鄕), 예향(禮鄕)이게 한 까닭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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