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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천지구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516
한자 連谷-沙川地區戰鬪
영어음역 Yeongok Sacheon Jigu Jeontu
영어의미역 Yeongok Sacheon Battle
이칭/별칭 동해안지구전투,강릉전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인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50년 6월 28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발생(시작)장소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관련인물/단체 제8사단|제10연대|제18포병

[정의]

한국전쟁 중 강릉 일대에서 북한군과 국군 제8사단 간에 벌어진 전투.

[개설]

강릉 일대에서 1950년 6월 25부터 28일까지 방어와 해안선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국군 제8사단이 양양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던 북한군 제5사단에 맞서 4일 동안 치른 방어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북한군은 전쟁 전부터 오대산을 통하여 공비들을 계속 남파하였다. 남파된 공비들이 오대산, 태백산 일대에서 준동하기에 이르자 제8사단은 1949년 9월 22일부터 오대산 및 그 남쪽 일원에서 1950년 5월까지 8개월간에 걸친 공비 토벌을 실시하였다.

1950년 6월 중순경에 들어 북한군은 다시 제8사단의 병력 분산 및 후방 교란, 북한군 제2군단의 남진을 지원하기 위해 특수훈련을 받은 60여 명의 공비를 남파하였다. 그러나 제8사단은 오대산 일대에서 수색전을 전개하여, 6월 22일에는 55명의 공비를 생포하거나 사살하였다.

또한 북한군은 남침 20여 일 전인 6월 초순부터 부대 편성을 전시 체제로 개편하였다. 북한 제2사단, 제5사단, 제7사단, 제15사단 등 4개 사단을 휘하에 두고 창설하게 된 제2군단은 남침전략에 따라 6월 23일까지 군단지휘소를 화천으로 추진하는 한편 제5사단을 양양, 제7사단을 관대리, 제2사단을 화천, 제15사단을 군단 예비로 38도선 일대에 전개하여 남침준비를 완료하였다.

강릉 지역으로 공격한 북한군 제5사단은 그 전신이 중공 제164사단으로서, 10,000여 명의 한적병사(韓籍兵士)가 1949년 8월 23일 장춘으로부터 회령을 거쳐 나남으로 입북 제10, 11, 12연대로 개편하고 사단으로 발족하였다. 따라서 이 사단은 국공(國共)내전을 통하여 2~3년에서 5~6년에 걸친 전투경험을 가진 비교적 우수한 병사로 구성되었으며, 사단 공격까지의 재훈련을 마친 북한 최강을 자랑하는 정예사단이었다.

남한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제8사단이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제8사단은 1949년 6월 20일에 제6사단 예하의 제10연대와 제5사단 예하의 제21연대를 기간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창설되었다. 제8사단의 예하 10연대는 38도선 일대에, 21연대를 후방에 배치하여 38도선 경비와 오대산에서부터 태백산에 이르기까지 북한 유격대 및 잔존 공비들의 소탕에 임하고 있었다. 제8사단의 방어 지역은 진흑동~기사문리의 26㎞였으며, 주력은 강릉, 오대산, 임계, 장성, 북평, 삼척 등지에 각각 분산되어 있었다.

[목적]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 38도선을 넘은 북한군으로부터 강릉 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4일 동안 벌인 전투이다.

[발단]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5사단은 증강된 2개 연대를 주공으로 동해안로에 지향시키고, 1개 연대를 산간도로를 따라 서림리에서 광원리로 남진시켜 총공격을 개시하여 남침 당일 강릉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공격 개시와 더불어 북한군은 유격부(제766부대)와 상륙전부대(제549육전대)를 정동진, 옥계, 임원진 등으로 상륙시켜 동해 지역의 이동로를 차단하고, 비정규전을 감행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아군의 병력을 분산시킴으로써 북한군 제5사단을 비롯한 제2군단의 남침을 촉진시키려 하였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제10연대가 주둔하고 있던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남쪽 2㎞ 지점에서 188고지에 낙하한 1발의 포격을 신호로 38도선 일대에는 포탄이 쏟아졌다. 4시 30경부터는 북한군 제5사단이 잔교리-정족산-서림리에 이르는 38도선 경계진지를 돌파하여 남침을 시작하였다. 제5사단은 동해가도에 주공을 두고 그 주력이 아군 제10연대방어 지역으로 지향되었으며,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549부대는 해상으로 침투하여, 동해안의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했다. 이들의 작전 기도는 동해안 도로를 차단하여 제10연대에 대한 증원을 저지하면서 강릉을 동 측방으로부터 위협하고 아군의 병력 집중을 방해하며, 주력의 남침에 앞서 지역 내 잔류공비와 제휴하여 후방을 교란하려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기습하자 북분리~어성전리를 연결하는 능선에서 방어진지를 급편했으나 오전 8시가 조금 지날 무렵 주문진 선으로, 오후 8시쯤에는 연곡천 선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8연대의 우 일선으로서 동해안~정족산[869m] 동쪽에 이르는 14㎞의 정면을 담당한 제2대대(소령 조원영)는 전열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제2대대는 인구리 서북쪽 2㎞에서 철수부대를 수습하고 현 진출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하였다. 이때 연대장으로부터 대대에 하달된 명령은 축차 철수하면서, 적에게 타격을 주고 주문진을 고수하라는 것이었다.

제1대대(소령 박치옥)는 제3대대(소령 하병래)와 38도선 경계 임무를 인수인계하는 기간 중에 북한군의 남침을 당하게 되어 대대장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광원리에서 일부 부대를 수습하여 사단 저지진지이자 대대 주저항선인 향호~하월천리를 연한 고지군을 확보하고 57㎜ 대전차포 중대 제1소대를 투입하여 기갑부대의 남침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18:00에 이르러 2개 대대 규모의 적이 공세를 펼치게 되자 이와 같은 전황을 보고받은 연대장은 불과 1개 대대 병력으로 야간에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 연곡천의 사단 주저항선으로 축차 철수토록 명령하였다.

연곡천 선으로 물러선 제2대대는 제2중대, 제10중대 양 중대를 통합 지휘하여 동해가도 동쪽의 사천선 일대의 고지군을 점령하고, 도로 서쪽의 능선 일대를 확보한 사단 혼성대대와 연계를 유지하며, 포병의 지원 아래 결전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제1중대와 제4중대가 이곳에 도착하였으며, 곧 제21연대 혼성 제1대대도 이곳에 진입하게 되었으므로 연곡천 방어선은 증강되었다. 그러나 연곡천 선에서의 지휘는 제10연대, 제21연대 및 사단직할대로 분할되어 있어서 협조된 작전을 실시하는 데는 애로가 있었다.

한편, 삼척에 주둔하고 있던 제21연대는 6월 25일 10시에 이르러 “제21연대는 강릉으로 집결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연대에서는 삼척 광산지대와 각 공장의 차량을 징발하여 제1제대로서 제1대대와 2대대 및 57㎜ 대전차포 중대가 출발하고 제3대대와 연대본부는 부연대장 지휘하에 제2제대로 출발토록 하였다. 그러나 제21연대장은 적의 주력이 밤재를 차단하고 있어 북평-백봉령-삽당령-구산리로 우회 이동하여, 주력은 26일 10시 30분경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하였고, 3대대는 강릉으로 행군하여 본대와 합류하였다. 또한 전투 편성을 완료하고 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한 사단 공병대대는 전방대대인 10연대 2대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 있었다.

이 당시에 국군 보병의 후방에는 18포병대대가 있었다. 포병대대는 화력지원 태세를 갖췄으나 사거리가 미치지 못해 보병연대의 후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오후 11시쯤 18포병대대는 관측장교 김용운 소위의 지휘 아래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서 적으로 확인되는 무리들에 대해 무차별 포탄세례를 퍼부었다. 일렬종대로 내려오던 적들이 주문진 남쪽 양지말 일대에 집결하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이 포격이 주효함에 따라 주문진까지 진출한 적은 밤사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고 기동부대는 연곡천 일대를 주저항선으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적은 주문진으로부터 계속 남하하였고 소규모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사단장이 반격을 감행하여 38도선을 수복키로 결심하였다. 제10연대장은 제2대대에게 천마봉을 탈취하여 주문진으로의 공격지점을 확보토록 명령하였고, 제2대대는 1950년 6월 26일 밤 주저항선 전방의 천마봉을 공격해 탈취하였다. 천마봉을 점령하게 되자, 연대는 1950년 6월 27일 5시에 주문진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날 4시 30분에 적이 선제 공격을 실시하여 계획은 무산되었다. 천마봉 일대에 적의 포화가 집중되면서 2개 대대 규모의 적이 3면으로 포위 공격을 가해 왔다. 대대는 대대장 지휘 하에 전 화력을 집중하여 근접하는 적과 접전을 벌였으나 후속하는 무리가 점차로 진내로 침습하게 되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였다.

제3대대가 배치된 연곡천 선에도 적의 포격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치열해 졌다. 점차로 증가되는 적의 압박으로 제2중대가 철수하였는데, 이것을 목격한 인접 공병대대가 철수 명령이 하달된 것으로 착각하고 임의로 철수함으로써 주저항선이 조기에 붕괴되고 말았다.

사단은 사천선으로 철수한 공병대대(혼성대대) 엄호 하에 병력을 수습, 제10연대 혼성3대대를 경포대~난곡리에 이르는 동해가도 동쪽 능선에, 제21연대 혼성대대를 난곡리~하유천에 이르는 동해가도 서쪽 능선에 각각 급편진지를 점령케 하여 적의 진격에 대비토록 하였다. 그러나 사단장은 육군본부와의 통신이 두절되어 전 전선의 상황을 알지 못한 가운데 지형적인 조건으로 적의 퇴로 차단의 위협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일단 대관령으로 철수, 부대를 정비한 후에 사후 대책을 강구키로 하였다. 사단과 대치한 적 또한 차후 공격을 위하여 재편성 중인 듯 상황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950년 6월 27일 14시 사단은 잔여 보급품 수송차량을 선두로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을 누비며 포병의 엄호 하에 철수를 개시하였다. 사단사령부와 10연대는 유천리에, 21연대는 횡계리에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적은 1950년 6월 27일 21시 50분경 강릉에 진입하게 되었다.

제8사단장은 2개 연대의 재편성 상태를 점검한 후 강릉 탈환을 결심하고 공격 명령을 하달하여 1950년 6월 28일 새벽 4시에 기동하여 8시에 구산리 공격 개시선으로 약진케 하였다. 주공격 대대인 21연대는 성산리를 거쳐 홍제동으로 공격을 개시하고 10연대 1대대도 구산리 동측의 칠봉산에서 공격제대의 측방을 엄호하였으며, 포병은 보광리 입구에서 화력지원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6사단 사령부로 부터 “원주로 철수하라.”는 육군본부의 명령을 받은 제8사단은 철수하게 된다.

[결과]

북한군의 공세로 6월 27일 국군 제8사단이 강릉을 철수하였다. 철수 후 횡계에서 부대를 재정비하고 강릉 탈환을 시도하였지만 결국 강릉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북한군은 강릉 점령 후 피난민들의 귀환을 강요하고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였다.

[의의 및 평가]

강릉 지역의 전투에서 제8사단이 많은 인명 손실을 내고 철수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적의 전면 남침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공격 징후를 묵살 또는 소홀히 하여 공비토벌 또는 산업시설 경계 등을 위하여 부대를 과도하게 전개함으로써 적의 전면 남침에 대비하지 못한 데 기인하였다. 그러나 제8사단이 강릉에서 북한군에 밀려 철수는 하였지만 북한군 제5사단의 신속한 남하를 방해하고, 평창~영월 선으로 병력을 분산 투입케 함으로써 북한군의 포항 진출 시일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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