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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패잔병 강릉재침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786
한자 北韓軍敗殘兵江陵再浸透戰鬪
영어음역 Bukhangun Paejanbyeong Gangneung Jaechim Jeontu
영어의미역 Gangneung Battle with Defeated NK Troops
이칭/별칭 강릉재침,주문진습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강릉시 청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인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재침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950년 11월 16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50년 11월 18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성덕지서 앞 고개(범정골 또는 범진골)
발생(시작)장소 강원도 강릉시 청량동
관련인물/단체 학도병|강릉경찰서|함종성|대한청년단|한경석

[정의]

한국전쟁 시 북한군 패잔병들이 퇴각하면서 강릉 지역을 공격하여 벌인 전투.

[개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남한 내에 고립되어 있던 북한군 패잔병들이 동해안 산악지대를 따라 북상 중에 1개 사단 병력이 강릉을 공격하여 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1950년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고, 북한군 6개 사단 이상의 북한군이 남한 내에 고립됨으로써 북한군 전력이 분산되어 버렸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작전명령 109호에 의하여 38도선 진격이 결의된 1950년 9월 30일 3사단 22연대가 강릉을 탈환하였고, 3사단 26연대는 삼척에서 LST(Landing Ship Tank: 전차양륙함[戰車揚陸艦])로 출항하여 주문진에 상륙하였다.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의 경쟁적인 진격으로 10월 1일에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2일에는 간성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국군의 너무 빠른 북진으로 북한군의 많은 잔적들을 뒤에 남겨두게 되었는데,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패하여 남한에 고립되어 잔류 중이던 북한군 5사단, 7사단, 8사단 병력 약 2만 명이다. 이들 북한군 패잔병들은 산악지대를 따라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교전하면서 각종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목적]

낙동강 전선에서 패한 북한군이 동해안을 따라 퇴각하던 중 강릉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북한군에 맞서 강릉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발단]

북한군 패잔병의 강릉 재침으로 인한 전투는 1950년 11월 16일 11시경 북상 중인 북한군 패잔병 1개 사단의 척후병을 성산면 오봉리 입구에서 생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생포된 척후병에 대한 심문을 통해 북한군 패잔병 본대가 1950년 11월 16일 밤 10시를 기해 강릉 지역을 대규모로 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경과]

당시 강릉에는 국군보충대 200여명이 경비를 맡고 있었을 뿐이어서 북한군 패잔병 약 6,000여 명의 침공을 감당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강릉 지역 주민들의 힘만으로 강릉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강릉을 사수하기 위하여 국군보충대원들과 한청대원 300여 명, 경찰 200여 명, 학도병 100여 명은 강릉시의 남대천 제방, 철길 등 주요 지점에 배치되었다. 또한 직사포 3문을 강릉경찰서 뒷산(현재 강릉시 용강동한국방송공사 강릉방송국 위치)에 배치하고 북한군 패잔병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과 무기들을 모두 동원하여 북한군을 맞아 치열한 혈전을 벌였으나 북한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방어선에 배치된 한청대원과 방위군, 경찰관이 전패를 하고, 방어선에 배치되었던 한청대원 한경석 외 222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병력들은 분산이 되었다. 병력이 분산되자 성덕지서 앞 고지에 집결한 병력 80명을 당시 경비주임이었던 함종성 경위가 3개 소대로 재편성하여 배치하고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교전 중에 사면을 포위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경찰관 9명, 한청대원 11명, 방위장교 1명, 소방대원 1명 등 22명이 생포되어 구정지서로 압송되어 대부분 처형되었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강릉을 점령하였던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1950년 11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 동안 저지른 만행이다. 북한군은 강릉에서 반공에 앞장섰던 학생들은 물론 부역을 거부한 민간인 200여 명을 강릉시 홍제동 152번지 뒷단 저수지(포강)에서 집단학살하였으며, 강릉시 노암동 234-7에 있는 기차터널에서도 100여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이 외에도 강릉농업고등학교 아래 월대산, 안목 바닷가, 명주군 구정면사무소 앞 개울가, 주문진수산고등학교 자리 등에서도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북한군의 재침 3일 동안 학살된 사람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000여 명에 이른다는 생존자들의 증언 기록이 있다.

[결과]

북한군 패잔병들의 강릉 재침으로 수많은 군인, 경찰관, 한청대원, 학도병들이 전사하였으며, 반공인사나 북한군의 부역을 거부한 수많은 민간인들이 무참히 집단 학살되었다. 현재 강릉시 노암동 남산에는 한국전쟁 당시 패주하는 북한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전사했거나 학살당한 대한청년단원 222명의 영령을 위한 한청순국동지위령탑이 서 있다.

[의의와 평가]

병력 수와 장비 면에서 절대 열세인 상태에서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군경과 민간인들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강릉 지역이 다시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희생자들의 고귀한 정신은 오늘날에도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0.10 제목 및 내용 일관화 북한군 패전병 -> 북한군 패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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