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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358
한자 東海神廟
영어음역 Donghae Sinmyo
영어의미역 East Sea Tutelary Shrine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민간 신앙 유적
지역 강원도 양양군 조산리
집필자 장정룡

[정의]

우리나라 동해안의 동해신을 모신 곳.

[개설]

동해신묘의 창설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명나라 태조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고려에 사절을 보내서 국내산천에 제사를 행하고 임금이 목욕재계하여 친히 축문을 고하였다 한다. 조선왕조가 세워지면서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명나라 법전에 따라 동해묘를 중건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사해(四海)가운데 첫 번째로 동해신(東海神)의 신호(神號)를 내렸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이러한 방증으로도 동해신묘의 창건시기를 이 시기로 상정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동해신묘의 건립 연대를 고려 공민왕 19년 즉 137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제6대 성종 10년(991)에서 고려 제8대 현종 19년(1028)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조선 초기 사전(祀典)이 정비되면서 동해묘는 중사(中祀)로 제정되었다. 태종 14년(1414) 8월 예조에서는 동해는 양양, 남해는 나주, 서해는 풍천으로 정하고 치제를 관에서 주관하였다. 동해신묘의 본래 위치는 『양주지』에 의하면 강릉 안인포에 있었으며 성종 21년(1490)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양양읍 조산리로 이전함에 따라 이건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관우의 신위를 봉안하고 분향을 했으며, 일체의 예법을 중국 명나라 광덕왕의 예법에 따랐다고 한다. 애초에 정동촌에 있었던 당시 관우신위를 봉안한 것인지, 옮겨지면서 그와 같이 된 것인지 또는 본래 정동촌에서는 용왕신위였는데 관우신위로 바뀐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일부에서는 『세조실록』, 『대동지지』에 의하면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의 이건 연혁에 동해신묘 이전 기록이 없으며, 허균『성소부부고』「중수 동해용왕비문」 내용의 허구성을 밝히면서 동해신묘가 처음 양양에 세워진 이래 계속 양양 땅에 있었다고 한다.

[명칭유래]

동해신묘는 동해 용왕신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건립경위]

동해신묘의 건립 연대를 고려 공민왕 19년 즉 137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허균이 쓴 「중수 동해용왕비문」에 의하면 경위가 밝혀져 있는데 즉 “강릉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우리나라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의 중앙이 되는 곳을 가려 설치하였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正東)이며 더욱이 고을 한 가운데가 상개(爽塏)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 불렀으며,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지냈다.”고 한 내용으로 미루어 동해 정동에서 제사를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의 동해묘는 경주의 동쪽인 아등변(阿等邊: 지금의 영일군 흥해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려사』에 보면 고려 때는 개성의 정동(正東)인 양양에 동해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 때부터 강릉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허균의 글이 맞지 않음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위치]

동해신묘는 본래 정동진에 있었으나 현재는 양양 조산리에 이전되어 있다. 고려 때 양양에 건립되어 복원만 했을 뿐 단 한 차례의 이전 없이 양양에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형태]

조선조 영조[1724~1776] 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양양부」의 “동해묘는 정전(正殿) 6칸, 신문(神門) 3칸, 전사청(奠祀廳) 2칸, 동서재(東西齋) 각 2칸, 백천문(百川門) 1칸으로 그 규모를 기록하고 매년 정초 세수(歲首)에 별제(別祭)를 거행하고, 중춘과 중추에는 상제(常祭)를 올린다. 제사에 쓰일 향축은 나라에서 보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동진의 동해신묘도 이러한 규모로 유추되나 전하는 자료가 없다.

[금석문]

허균이 1605년에 쓴 「중수동해용왕비문」은 글만 남고 비석은 없어졌고 남공철(南公轍)에 의한 「동해신묘중수기사급명(東海神廟重修記事及銘)」[1800년]만이 양양 동해신묘에 있다.

[현황]

『양주지』에 의하면 동해신묘가 본래는 강릉에 있었는데 성종 21년 경술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강릉으로부터 대포성(大浦城)에 이전할 때에 양양 조산으로 같이 이건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그러나 고려 제 6대 성종 10년(991)에서 고려 제8대 현종 19년(1028) 사이에 건립된 이래 계속해서 양양에 있었다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2014년 현재 강릉 정동진 동해신묘가 있었다고 전하는 곳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양양 조산리 동해신묘에서는 매년 정초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동해신묘는 동해를 지키는 신에게 국가에서 중사의 격으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우리나라의 정동인 강릉 정동진에서 그 제사를 지냈다. 정동진이 국가적인 치제의 중심이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견해가 구체화되고 있으므로 좀 더 연구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12.31 [현황] 수정 <변경 전> 현재 강릉 정동진 동해신묘가 있었다고 전하는 곳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변경 후> 2014년 현재 강릉 정동진 동해신묘가 있었다고 전하는 곳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2013.03.14 원고 전반적인 내용 보완 논문 '동해신묘의 역사적 고찰과 이해(이기용)' 내용 검토 후 동해신묘에 관한 내용을 두 가지 견해로 보완
이용자 의견
최** '동호승람'(1933)에 '옥계동해묘기우제 축문'이 전하고 있고
일제시대 및 1965년까지 면장이 주관하여 금진1리 청룡뿔에서
동해묘 제사를 지냈음.
  • 답변
  •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동해신묘에 관한 검증된 정확한 근거 자료가 없어서 두 가지 견해로 원고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31
관**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논문 자료 검토 후 내용 보완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3.14
이** 신라는 삼국사기에 동해는 영일군에, 북해는 삼척군에
고려시대에는 고려사에
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동해신묘는 양양에 있다고 하고있고,
정동진에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음
이는 2012년 한국문화원연합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동해신묘의 역사적고찰과 이해를 보면 알수있음
blog.daum.net/risedragon/1747829 참고바람
20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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