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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831
한자 金光里公所
영어의미역 Geumgwang-ri Catholic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지도보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남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천주교 공소
설립연도/일시 1887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이철연

[정의]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에 있는 천주교 춘천교구 노암동성당의 공소.

[개설]

금광리 공소 현판에는 1887년 창립으로 적혀 있어 19세기 말에 벌써 신자들이 이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광리 공소 신자들이 1921년 가을 판공 때 최문식 양양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로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신자 수가 149명이고 공소 강당과 신부가 머무를 수 있는 사제관도 갖추어 놓고 있었기에 1921년 12월 2일 이 신부는 금광리 공소로 부임하였다.

[설립목적]

농사와 옹기 굽는 일이 수월한 금광리로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정보교환 및 신앙생활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설립경위]

영동 지역 공소는 기존의 주요 역로와 간선도로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이는 박해를 피하여 이동하였고 또한 교우끼리 정보교환을 하는데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생계수단인 옹기를 굽기 위해 필요한 양질의 흙, 물, 땔감 등이 풍부한 곳이 영동 지방이었다. 1866년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영동 교우촌의 신자들은 1870년대 초까지 박해가 계속되면서 신자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였다. 차츰 박해가 종식되면서 영동 지역 교우촌은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더 확대되어 갔다. 대관령에서 강릉시내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삼정평을 지나 금광리는 농사와 옹기 굽는 일이 수월한 지역이었기에 1921년 금광리 공소에 149명의 신자가 있었다.

[변천]

1921년 12월 2일 이철연 신부 부임 후 호세(戶稅)와 포교계(布敎屆) 제출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남녀 교리학교를 각각 1개씩 설립하고 이어 남자 소학교도 설립하였다. 그러나 금광리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하였기에 본당 중심지를 양양 쪽으로 옮기려고 1923년 11월 23일 주문진으로 이전하여 본당을 세웠다.

[현황]

남자 신자 17명, 여자 신자 33명, 총 신자는 50명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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