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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713
한자 敎會
영어음역 gyohoe
영어의미역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남현

[정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

[개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와 체계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884년 흐레이스 뉴톤 알렌에 의해서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85년 부활절에 장로교의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라 목사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새문안교회와 정동교회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한국에 선교하기 위해 진출한 개신교의 각 교파는 전교의 효율성을 높이고 박해에 대하여 공동 대처하기 위하여 선교 구역을 분할하기로 결정하여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와 경상북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이의 관리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역분할 관리가 여의치 않자 1909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파송된 선교사 수에 의하여 선교 구역을 분할할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여 이때 강원도는 북감리회와 남감리회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원, 횡성, 평창, 영월, 정선, 강릉, 삼척, 울진, 평해는 북감리회에 속하게 되고, 그 외는 남감리회에 속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영동 지역의 초기 선교는 북감리교회가 강릉 이남 지역을 담당하였고, 남감리교회가 강릉 이북 지역을 담당하였다.

[강릉지방 교회 변천 및 현황]

1) 감리교회

남감리교회 선교사인 하다(R. A. Hardie, M. D.) 선교사가 1898년 5월 15일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본래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여 8년이 지난 후 한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전입을 요청하자 쌍방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제중원에서 한때 시무한 후 1891년 4월 부산으로 내려가 의료선교에 주력하였고 그후 1892년 원산으로 사업장소를 옮겼다. 1900년도에 원산구역장 하디에게 영동 지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디는 윤성근을 자신의 매서인 겸 전도인으로 채용했다. 하디와 윤성근은 강원도 산골 오지로 다니면서 전도활동에 전념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하디 목사는 1901년 한 해 동안 강원도를 다섯 번이나 순회하며 교회를 세웠는데 강릉중앙감리교회도 이때 세워진 것으로 해석된다. 강릉에서도 모임이 활성화 되었는데 명성국이라는 사람이 명주동에 자기 집 초가 8칸을 제공하여 임시 기도처로 정한 후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강릉중앙감리교회는 강릉 지역의 모판같은 역할을 감당한 교회로서 일제 시대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강릉의 교육과 사회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강릉 지방에 가장 먼저 들어온 교파는 미국 남감리교회로, 1902년 신자 이동식 씨와 남감리회 소속 의료 선교사인 하디 선교사에 의해 강릉시 명주동 명국성 씨 소유의 초가 8칸짜리 집에서 예배와 기도를 드림으로써 강릉에 감리교회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기도소에서 하디 선교사의 열성에 힘입어 1905년 명국성, 서광우, 안택영, 윤매리, 김도영, 이은혜, 이내의 씨 등 신자들이 자주 모임을 갖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중, 1912년 이 모임의 개척자인 이동식 씨가 목사 안수를 받고 강릉에서 목회를 주관하게 되면서부터 전도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의 신자 수는 『강릉중앙교회연혁』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20명~50명 내외였다고 한다.

1915년 5월에 미국인 모리시이 선교사에 의해 강릉 임정 142번지 기도소 구내에 의숭유치원이 개원됨으로써 복음 전파와 영재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교회 명칭이 강릉중앙교회로 바뀌게 될 때 의숭유치원 이름도 강릉중앙유치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릉중앙감리교회의 전신인 강릉예수교 남감리교회가 부흥을 하는 것은 제3대 안경록 목사 때이다. 특히 1919년 강릉 지방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애국지사인 안경록 목사의 지도와 교회 안의 엡윗청년회의 조직이 큰 활약을 하여 일제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큰 부흥을 하게 되어 신자 수는 100명에 이르렀다. 강릉에서 이처럼 3·1만세운동이라는 애국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 데에는 교회 청년회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1900년 초 강릉 지역에 설립되었던 사립학교 동진학교초당의숙, 화산학교 등에서 공부한 선각자들의 역할도 컸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15년 영동 지역의 감리교인 수는 『감리교 연회록』에 의하면 입교인 283명, 학습인 225명, 유아세례 91명, 구도인 378명, 목사 5명, 권사 7명으로 되어 있다. 강릉중앙감리교회의 신자가 100여 명이나 된 것은 당시 강릉 지역의 개신교 전도열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하겠다.

1919년 『감리교 연회록』에는 1918년 원주 구역이 관리하는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원주와 강릉 두 구역으로 나눌 것을 결정했음을 밝히고, 이 때 강릉 지역에는 6명의 목사와 9명의 전도사 그리고 16명의 권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1년 5월에는 강릉 지역 교회역사상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다. 금학동 22번지에 대지 207평, 건평 67평에 달하는 목조 한식 기와집 예배당이 정식으로 세워진 것이다. 머릿돌에는 ‘구쥬강셩후일쳔구백이십일년 오월 강릉예수교 미감리회당’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다. 강릉예수교 남감리회당은 오늘날 강릉중앙감리교회의 첫 이름이다.

1921년 안경록 목사가 당시 강릉중앙교회에 대하여 연회에서 보고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신축 강릉중앙교회당은 금년 7월 말이면 완공될 것이다. 그것은 25칸짜리 건물이다. 구예배당은 유치원으로 사용할 것이다.”라고 당시 교회 건축의 현황을 보고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유치원은 의숭유치원인데, 1924년 3월 27일 임정 142번지로 이전되었다가 1953년 3월 27일 금정 92번지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강릉에는 145명의 신도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1935년 1월 강릉예수교 남감리회당은 제10대 한기모 목사 재임 중에 교회 이름을 금정교회로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이 교회의 박병수, 전승훈 장로를 중심으로 신자 약 70여 명이 이른바 재강파를 형성하여 교권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1936년 6월 10일 강릉읍 대화정 11-1번지에 대화정 감리교회를 차려 분리하여 나갔다. 대화정 감리교회는 1944년 7월 폐지되는데 이 교회가 현 강릉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943년에서 1945년 8·15 해방 전까지 금정교회와 대화정교회가 강제 통합되는 진통도 겪게 된다. 이는 일제가 패전의 기운이 짙게 되자 항공기 헌납 명목으로 대화정교회를 폐쇄하고 매각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신사참배 문제 등으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도에 달해 있을 때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강릉금정교회는 강릉중앙교회로 교회 이름을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계에 감리교회가 들어선 때는 1904년 옥계중앙교회가 처음인데, 원산에서 온 선교사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전쟁 때 교회의 모든 서류가 불타 개척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주문진에 감리교회가 세워진 것은 1910년으로 이해 11월 5일 미감리회 선교사 쿠퍼 목사와 유안나 전도사에 의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도의 가정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주문진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930년 건평 20평의 교회를 신축하고 1931년 3월 모루의 선교사 부인에 의해 신성유치원이 개원되어 1966년까지 73회 2,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주문진감리교회는 1931년 3월 22일 에 강릉 구역에서 주문진 구역이 되었다. 1975년 8월 현 주문3리에 교회당 121평, 유치원 40평을 다시 신축하였다.

2)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감리교회와 함께 영동 지역에 선교를 담당한 교파는 성결교회였다. 『한국성결교회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성결교회는 1904년 정빈, 김상준 씨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성서학원을 수료한 후 한국에 돌아와 동양선교회의 지원으로 ‘복음전도관’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1921년에는 이를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파로 개칭하는데, 영동 지역에는 미 남감리교회와 더불어 성결교회가 들어오게 된다.

강릉에 성결교파의 기도소에서 첫 집회가 시작되는 것은 1923년 3월로 이는 경성신학교 지방전도대에 의하여 강릉읍 용강동 28번지 박신동 씨 집에서이다. 이것이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강릉성결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925년 9월 첫 주일에 거진학 전도사가 부임하여 박신동, 서순명, 최원주, 김인, 김상열, 이부대 등 장년 5명, 유년 13명의 신자와 함께 창립 예배를 드렸다. 1928년 4월 28일 강릉성결교회는 북청지방 관할이 되었다.

1930년 8월 약국 성황당 터 자리인 임당동 171번지에 대지 578평 건평 20평의 양철지붕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1930년 당시 강릉에는 강릉예수교 미감리회당과 강릉 성결교회 두 교회당이 있을 뿐이었다.

일제에 의한 교회 탄압은 강릉성결교회에도 뻗치어, 1943년 5월 24일 교직자 검속령에 의해 이옥근 전도 부인 등 10여 명의 신자들이 투옥되었다. 1943년 12월 28일에 강릉성결교회는 폐쇄를 당하여 해방될 때까지 신자들은 금정교회에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9일 성결교회 재흥 총회에서 5개 교구 가운데 중부 교구에 속하게 된 강릉성결교회는 교회 명칭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릉의 성결교회는 강릉교회를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

강릉시 강동면 정동에 영동성결교회가 시작된 것은, 1956년 6월 영동광업소가 개광되면서, 광원들 가운데 개신교 신자였던 사장 최호 씨와 김영길, 장의찬, 원필순, 정선자 씨 등을 중심으로 임시 기도처를 정하여 예배를 드리면서부터이다. 1958년 3월 어린이 37명(남20, 여17), 어른 21명(남8, 여13)이 최호 씨 집을 예배처소로 삼아 영동교회가 시작되었다. 1959년 11월 영동광업소의 기부로 대지 259평 건평 28평의 교회가 신축되었다.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교단에 가입된 것은 1962년 5월의 일이다. 광산의 번창과 함께 교세도 일어나 1980년 중반에는 세례 교인수가 약 150여 명에 달했으나, 1990년부터 시작된 광산합리화 정책으로 폐광되자 주민의 4분의 3이 떠나면서 상황이 어렵지만 정동진 관광개발로 인하여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

월호평동에 신석성결교회가 세워진 것은 1963년 최춘근, 김옥열 등과 남신도 1명, 여신도 10명, 어린이 140명으로 시작되면서이다. 1965년에는 탁아소를 설치하여 저소득 아동의 보육사업을 실시하였으며 태풍 루사로 인하여 교회당이 손실되었으나 다시 예배당을 신축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

연곡에 성결교회가 선 것은 1966년 3월 박태희 전도사가 주문진 성결교회에 속해 있던 연곡 구역의 신자 20여 명을 별도로 분리하면서이다. 그 당시 연곡지서 주임사택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가 되었다.

3) 장로교회

장로교회가 강릉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45년 9월의 일이다. 1945년 9월 금학동 92번지에 있던 강릉금정교회가 강릉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자 1944년 7월 폐교된 대화정교회의 교인 가운데 이학원, 박병수 등 장로교인들은 1945년 9월 19일 강릉읍 임당동 133번지 이학원 씨 집에 모여 해방 축하 감사예배를 드리고 대한 예수교장로회 강릉읍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의했다. 다음날인 1945년 9월 20일 명주동 12번지의 개인주택을 개조·수리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현재 강릉제일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1945년 12월 김형도 목사가 취임하면서부터 강릉읍 교회는 경기노회 강원 시찰에 속하게 되었다.

1958년 8월 10일 정원희 목사가 부임하면서 명주동 12번지의 구가옥을 헐고 강릉읍 교회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1960년 1월 14일 교회 내에 일제 때에 일어난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교인 사이에 강경·온건 견해가 생기게 되어 결국 온건파에 속하는 교인 60여 명이 옥천동 한창은 장로집에서 모여 분리해 나갈 것을 결의했다. 이때 세운 교회가 동광교회인데, 현 강릉장로교회의 전신이다. 1976년 강릉읍 교회가 김욱도 목사 때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강릉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자 같은 해 동광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강릉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로교회의 특성 중 하나는 많은 교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교단은 강릉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합동측과 강릉장로교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측이 있으며 기독교장로회(관동장로교회), 고신측(시민교회) 및 군소교단으로 구별하고 있다.

4) 기독교 한국침례교회

기독교 한국침례회 관동지방회 소속 침례교회가 강릉에 들어오는 것은 초당동 공회당 앞에서 노방 전도대회를 개최한 1953년 2월 14일이었다. 강릉시 초당동 297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초당 침례교회가 그 효시이다.

초당 침례교회는 그 동안 현직 목사 10명, 여전도사 2명,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여선교사 1명을 파송하는 등 강릉 복음화의 모교회가 되고 있다. 그 후 1955년 10월 15일에 강릉침례교회, 1970년 5월 13일 신흥침례교회, 1977년 7월 10일에 오성침례교회, 1979년 1월 1일 동부침례교회, 1986년 6월 15일 대성침례교회, 1983년 3월 강릉중앙침례교회, 1989년 5월 1일 사랑제일침례교회, 1989년 10월 9일 사랑의 교회, 1990년 12월 27일 새강릉침례교회, 1993년 3월 15일 서광침례교회, 1994년 4월 5일 전원침례교회 등이 새로 개척되었고 면지역에는 1956년 9월 1일 구정침례교회가 서게 되고, 1968년 주문진침례교회, 1974년 10월 29일 왕산침례교회, 1975년 6월 6일 시동침례교회, 1976년 6월 11일 임곡침례교회, 1980년 11월 옥계침례교회 등이 개척되었다.

5)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가 강원도 주문진에서 처음 개척된 때는 1954년 4월 5일로 김수자 전도 부인과 10여 명의 신도에 의해서였다. 강릉그리스도의 교회는 1958년 6월 27일 래시 선교사가 강릉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함으로써 출발하였다. 1959년 3월 옥천동 232번지에 선교부 건물을 지었으며, 1963년 2월 병산하에 병산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되었다.

1965년 11월 강릉 그리스도의 교회율곡로 2834[옥천동 157-3]에 교회를 신축하였다. 1955년에서 1964년까지 강릉 병산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 수는 80명이었다. 현재 강릉그리스도의 교회는 1979년 10월에 신축된 것이다. 1965년에서 1974년 사이에 정선의 구절교회, 원주의 원주교회, 인제의 현리교회, 춘천의 춘천교회가 개척되는데, 이때의 교인 수는 총 310명이다. 1975년부터 1984년 사이에 원주에 원주중앙교회, 신평교회, 인제의 상남교회, 하남교회, 영월의 새하늘교회, 운학교회, 창평교회, 두식교회, 두덕교회, 강릉의 대기교회 등이 새로 개척되었다. 1985년부터 1994년 사이에 강릉에 제일교회, 벧엘교회, 산성교회, 평창군의 등매교회, 원주에 북원교회, 사북에 북일교회, 춘천의 새문안교회가 새로 개척되었고 강릉시에는 병산그리스도의 교회, 강릉그리스도의 교회, 제일그리스도의 교회 등이 있다.

6) 순복음교회

순복음교회가 강릉에 발을 내디딘 것은 1975년 강릉시 노암동 양지목욕탕 지하실에 자리 잡은 강릉 중앙순복음교회였다. 그러나 교세가 부흥되지 않아 유명무실하다가 1984년 강릉 중앙순복음교회를 이어받아 김용덕 목사의 인도로 10여 가정이 순복음 영동교회로 재출발하여 강릉시 경강로2268번길 11[포남동 1005-333번지]에 교회를 신축하였다. 1994년 10월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영동제일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지만 교회 건축 과정에서 어려움을 당하여 지금은 인천순복음교회에서 인수하여 동해안순복음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인천순복음교회 지성전으로 되어 있다.

7)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와 관계가 있는 종교 모임이 강릉에 처음으로 결성되는 것은 1911년이다. 당시 감리교회의 전신이었던 기도처 출신의 김도영이 안식교회 잡지인 『시조』를 통해 이 교파의 교리를 접하게 되어 가정안교를 시작함으로써 출발하였다. 그때 같이 모여 예배를 본 사람들은 이상희, 명국성, 이태이, 최해정, 김원재 등이었다.

1915년 강화석 전도사가 안식교회에 부임하고, 1921년에는 임당동에 건평 18평의 교회가 신축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교회가 폐쇄되었다가 1948년 김창주 전도사가 부임함에 따라 목조 60평의 교회를 임당동 50-1에 다시 신축하였다. 1952년에는 강릉 삼육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현재의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건물은 1979년 11월 3일에 신축된 것으로, 현재 교인 수는 남신도 49명, 여신도 101명이다.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1989년 5월 성덕포남로174번길 42[포남동 1188-18번지]에 건평 60평의 동부교회를 분가시켰고, 헌당 예배를 드렸는데 남신도 29명, 여신도 71명이다. 그 외 주문진 제7일 예수재림교회, 강동교회, 남부교회 등 3개 교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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