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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372
한자 江陵地方樓亭文化-鏡浦八景
영어의미역 Pavilions of Gangneung and the Eight Scenic Views of Gyeongpo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임호민증보:박석중

[정의]

경포 호수 주변에는 많은 누정들이 산재해 있으며 정자에는 경포 호수의 자연 풍광을 읊은 시문들이 많이 전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포팔경(鏡浦八景)이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읊조리는 모습, 결사체 회합의 장소로 누정을 활용한 점 등은 전통적인 강릉 지방의 누정 문화이다.

[개설]

-물 좋고 산 좋으니 정자 있기 좋구나!-

흔히 하는 말로 ‘물 좋고 정자 좋기를 바라지 마라’고 한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춰지기를 바라지 말라는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물이 좋고 산이 좋고 정자마저 좋은 경우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도 된다.

산수 수려한 곳에 누정이 있는 것은 한국의 특징이다. 경치 좋다, 저기서 주위를 바라보면 좋겠다, 싶은 곳이면 으레 누정이 서 있다. 하물며 전국적으로 풍광 빼어나기로 소문난 것이 강릉 지역의 누정 아니겠는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강릉 지역의 누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경포(鏡浦)는 강원도 기념물 제2호로서 강릉시 저동, 운정동, 안현동, 강문동, 포남동, 초당동 등 여러 고을을 끼고 있는 명승지이다. 경포 호수의 풍광은 경포팔경으로 대변된다. 이 호수의 주변에는 많은 누정들이 산재해 있으며 또 정자에는 경포 호수의 자연 풍광을 읊은 시문들이 많이 전한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독특한 누정 문화를 낳는다. 공간적인 전통 건축물인 누정과 시공을 초월하는 시문학이 조화를 이루어서 형성되는 것이 누정 문화의 특성이다.

장구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건립되어 온 누정은 생활 공간이 아니라 문화 향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경포 호수 주위에 있는 정자로는 경포대(鏡浦臺),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 활래정(活來亭), 경호정(鏡湖亭), 석란정(石蘭亭), 상영정(觴詠亭), 취영정(聚瀛亭), 호해정(湖海亭), 천하정(天河亭), 월파정(月波亭) 등이 있다. 이런 정자들은 지역의 유림들이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는 장소였으며, 때로는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 자연 풍광을 감상하고 시를 짓는 문화 향유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정자들]

그럼, 강릉 지방의 누정 가운데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누정은 무엇일까. 먼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등장하는 ‘임해정(臨海亭)’을 들 수 있다. 신라 성덕왕[702~736] 대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중 ‘임해정’에서 쉬었다는 기록이 수로 부인[『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 “수로 부인”조. 聖德王代 純貞公 赴江陵太守行次 海汀晝饍 ... 便行二日程 又有臨海亭.]과 관련한 내용에서 파악되고 있다. 물론 임해정의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그 형태가 오늘날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누정의 모습이었는지는 분명히 밝힐 길이 없다. 다만, 부임하는 태수의 쉼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임해정’의 기능을 추측할 수 있고, 그런 측면에서 임해정을 강릉 지방 누정의 시초로 설명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확인되는 ‘한송정(寒松亭)’ 관련 기록이 주목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 樓亭 寒松亭. 亭畔有茶泉·石竈·石臼 卽述郞仙徒所遊處]. 즉 ‘한송정’은 ‘술랑선도(述郞仙徒)’가 소요하는 곳이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내용은 신라 화랑들이 사용하였다는 차샘[다천(茶泉)], 돌아궁이[석조(石竈)], 돌절구[석구(石臼)] 등의 유물들이 적어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되는 당시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입증된다. 더욱이 당시의 이런 유물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신라 시대의 ‘한송정’이 후대의 보편적인 정자 형태를 갖추었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 화랑의 도량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당시의 ‘한송정’은 그 형태를 불문하고 강릉 지방 누정의 시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신라 시대에 누정이 건립되었다면 당연히 그 다음 시대인 고려조로 이어졌을 것이고, 누정의 건립은 훨씬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초·중기의 누정 건립의 실상을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이 시기 누정 건립의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운 정도다.

현재까지 전하는 누정은 없지만, 고려 시대 강릉 지방 누정으로 대표적인 것을 찾는다면 ‘한송정’이 될 것이다. ‘한송정’은 조선 중기에 편찬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비록 훼철되었다고 파악되고 있지만,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한송정’은 여전히 강릉 지방 최고의 정자라는 평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한송정’은 적어도 고려 시대에는 실존하였을 것이고, 그 실상은 신라 때 화랑 ‘술랑선인’이 소요하였던 당시의 모습과 다른, 오늘날 볼 수 있는 정자의 모습을 구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초기의 누정으로 또한 주목되는 것이 경포대 자리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정이다. 강릉 경포대는 고려 1326년(충숙왕 13)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 박숙정(朴淑貞)이 인월사(印月寺) 터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경포대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그 이전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경포대가 건립된 곳에 보다 이른 시기에 누정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만약 이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경포대가 건립된 곳에는 이미 훨씬 이전에 정자가 건립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 누정의 건립 시기는 적어도 고려 초기로 추정될 수 있을 것이다. 1326년 존무사 박숙정강릉 경포대를 건립하면서도 이곳에 누정이 건립되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으나, 강릉 경포대의 건립 과정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누정 또는 어떤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건립 주체의 변화로 살펴본 강릉의 누정 문화]

강릉 지방 대부분의 누정은 여말 선초 이래로 건립된 것이었다. 후대에 이르면서 누정 건립은 점차 지역적으로 확산되면서 보편적인 양상이 되고, 건축 형태에서도 다양화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누정의 건립 주체를 중심으로 조선 시대의 강릉 지방 누정 건립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여말 선초의 누정은 관주도적으로 건립되고 있는데, 이런 관주도적 누정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민간 주도로 전환된다. 그 후 18~19세기에 들면 다양한 주체들이 누정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변화상은 조선 시대의 사회 변화와 맞물려 있다.

여말 선초 강릉 지방의 대표적인 누정은 의운루(倚雲樓)·운금루(雲錦樓)·한송정·경포대 등이 있었다. 1456년(세조 2)에 생원과 진사에 모두 올랐던 강릉박씨 박시형(朴始亨)이 「운금루기문(雲錦樓記文)」에서 이 네 곳의 누정을 당대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기문에는, 당시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라면 누구나 한번쯤 찾아보기를 소원할 만큼 강릉의 절경은 널리 알려져 있음을 전제로 하면서, 산과 바다와 호수가 어우러진 영동 지방의 풍광은 어느 곳이든 절묘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네 곳 누정의 풍광이 으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 누정, 운금루조. 擧一二大者 則官道有樓扁以倚雲 蓮塘有樓名以雲錦 東濱於海而有亭是曰寒松 北壓於湖而有臺是曰鏡浦 是皆形勝之最].

영동 지방의 절묘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누정으로 평가되었던 네 곳의 누정 가운데 두 곳은 관아의 누각이었고, 다른 두 곳은 바다와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정자였다. 전자의 2개 누각은 인공으로 조성된 연당(蓮塘)을 사이에 두고 건립했으니, 의운루와 운금루는 객관(客館)의 남쪽에 있어서 연당을 조망할 수 있었다. 후자의 두 누정은 바다와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정자였다. 한송정은 동해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해안 언덕 위에 건립되었으며, 경포대는 경호 북쪽에 건립하여 경포 호수와 그 너머 죽도(竹島)와 초당 마을을 조망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 관주도적인 누정 건립은 후대에 이르면서 읍성의 문루를 중수하는 형태에서도 살필 수 있다. 즉 동문에는 가해루(駕海樓), 서문에는 망진루(望津樓), 남문에는 어풍루(馭風樓), 북문에는 빙허루(憑虛樓)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누정 문화는 다분히 성리학적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1471년(성종 2) 강릉 부사 이신효(李愼孝)는 운금루를 절기로 중양절(重陽節)[음력 9월 9일]에 완공하고 그 낙성식에 지방의 원로들을 초청하여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향사례와 향음주례는 다름 아닌 『주례(周禮)』에 등장하는 향사례와 향음주례로서, 유교적 방식의 향촌 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자는 ‘효제충신 호례불난자(孝悌忠信 好禮不亂者)’를, 후자는 ‘연고 유덕 재행자(年高·有德·才行者)’를 각각 앞세워 교화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 건립된 강릉 지방의 정자는 해운정과 태허정(太虛亭), 쌍한정(雙閒亭), 향호정(香湖亭) 등을 들 수 있다. 이 네 곳의 누정은 지금까지 밝혀진 16세기에 건립된 누정으로서 대표적인 곳들이다. 태허정과 향호정은 문헌상으로 확인될 뿐 현재 전하지 않으며, 해운정쌍한정은 현재까지 온전하게 보전됨으로써 당시 강릉 지방 누정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16세기에 건립된 강릉 지방의 대표적인 정자를 건립한 주체는 재지사족이었다. 이들은 입신 출사하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낙향한 인사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선조 이래로 강릉 지방에 세거해온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다. 이들이 누정 건립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16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재지사족이 주체가 되어 누정 건립의 맥을 이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아울러 누정이 사족의 생활 공간의 일부로 수용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양상은 16세기 누정 문화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15세기 강릉 지방의 누정이 관주도적으로 건립되었던 사실과 비교할 때, 재지사족이 주체가 되는 양상은 16세기 누정 문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새로운 변화다.

재지사족이 누정을 건립하는 주체가 되면서 누정의 건립 장소와 건축 양식 측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먼저 누정이 재지사족의 생활 공간으로서 정착됨으로써, 지역적으로 확산되는 추이가 나타난다. 태허정과 해운정은 모두 경포 호수 주변 즉 현재의 운정동저동에 건립되었다. 고려 말엽 호수와 초당(草堂)과 죽도를 조망할 수 있었던 경포대가 건립된 이래로, 경포 호수 주변은 ‘경호지승 갑어아동(鏡湖之勝 甲於我東)[경포호의 빼어난 경치는 우리나라에서 첫째이다]’이라 하듯이 16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누정 건립의 최적지로서 주목받았던 것이다.

누정의 건축 양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점에서 쌍한정해운정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해운정은 소위 별당식(別堂式) 정자로서, 강릉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양식의 누정이다. 이전 시대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경포대나 운금루는 높은 언덕이나 관아의 부속 건물로, 사방이 탁 트인 누각이었던 데 비하여 해운정은 사방에 벽과 문을 붙이고 바닥에 온돌을 설치하여 장기간 유숙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별당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해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씌운 강릉 지방 최초의 별당식 정자다. 해운정은 후대에 건립되는 동일한 양식의 정자를 선도하는 의미를 갖는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포 호수 주변의 많은 정자들이 별당식으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해운정이 미치는 영향을 잘 말해 준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강릉 지방의 누정은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1933년에 강릉고적보존회에서 편찬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서 파악된 강릉 지방의 누정은 전체 54건으로, 그 중에서 당시까지 현전하는 것만도 31건에 이른다. 이러한 누정의 수는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지역에서 10건의 누정이 파악되었던 상황에 비추어 보면 괄목할 만한 증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증가 추세는 누정 문화가 향촌 사회에 보편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천하 제일강산 경포대를 말하다, 경포팔경]

강릉 지역의 많은 누정들이 경포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경포대 주변의 경관이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명성을 증명해 준다. 경포호는 군자호(君子湖), 어진개라고도 한다. ‘경포’란 호수가 거울처럼 깨끗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며, ‘군자호’와 ‘어진개’라는 지명은 호수의 수심이 깊지 않아 사람이 물에 빠져도 목숨을 잃지 않는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경포 호수는 옛날에는 둘레가 약 16㎞[약 40리]나 되었고, 주위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 주변에는 많은 정자를 거느리고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정자 중에서 호수 서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강릉 경포대는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으로 이름난 곳이며, 관동팔경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곳이다. 경포 호수는 육수와 해수가 상통하여 형성된 담호(淡湖)로서, 물빛은 마치 새로 만든 거울같이 맑고 호수는 사안(沙岸)으로 형성되었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호수 쪽으로는 해송이 무성하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경포대의 서쪽으로 증봉이 있는데 이곳은 돌절구가 있어 신라 때 화랑 영랑(永郞)이 수련하였던 곳이라 한다.

경포대 앞에는 거울과 같이 맑은 호수 경포[또는 경호(鏡湖)]가 있으며, 그 너머로는 푸르른 청송의 띠가 바다와 나란히 하고 있다. 그 너머로 다시 넓은 백사장과 바다가 펼쳐져 있다. 경포대는 뒤로 시루봉[증봉(甑峯)]을 등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울창한 송림이 빼곡히 두른 초당이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와 호수를 연결해 주는 강문(江門)이 있다. 이 같은 수려한 자연 경관은 많은 문객들을 매료시켰다.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에 올라, 2㎞에 달하는 백사장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또 창해만리(滄海萬里)를 내다볼 수 있는 경치를 읊었다. 또 백구(白鷗)[갈매기]가 날아드는 풍경과 흰 모래에 푸른 소나무, 백조부침(白鳥浮沈)의 풍경에 감탄하였다.

경포대의 풍광 중에서도 해돋이는 ‘바다와 하늘과 호수를 뒤덮고 모래 위에 이채(異彩)를 드리우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달돋이’의 아름다움 역시 매우 유명하여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에 홍장(紅粧)의 시 한 수로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해돋이와 달맞이, 그리고 선인들의 자취와 유묵(遺墨)이 전해지는 경포대가 보여 주는 풍경은 일찍이 ‘경포팔경(鏡浦八景)’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경포팔경은, 새벽에 경포대에 올라가 보면 바다와 호수 위를 찬란히 비추는 해돋이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뜻하는 ‘녹두일출(綠荳日出)’로 시작된다. 그 다음이, 멀리는 하늘의 달과 가까이는 바다와 호수의 세 가지 달을 보며 바닷물과 호수 물이 잇닿아 월주(月柱)를 이루고 은파(銀波) 위의 월굴(月窟)이 백해중(百海中)으로부터 호심(湖心)을 꿰뚫어 경포대 앞까지 수십 리를 뻗친 장엄하고도 기묘한 경치를 뜻하는 ‘죽도명월(竹島明月)’, 호수와 바다를 상호 교류하게 만드는 강문교 인근에서 나룻배가 야간작업을 할 때에 횃불이 바다와 호수에 어른거리며 비치는 광경을 뜻하는 ‘강문어화(江門漁火)’다. 해가 서산마루로 기울 무렵 울밀한 소나무 숲 속에서 새 소리 우지지고 달이 바다로부터 떠오를 즈음이면 저녁연기가 떠올라서 평화로운 농촌을 건너다보는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초당취연(草堂炊煙)’, 조선 초기 강릉 부사 조운흘(趙雲仡)과 관기(官妓) 홍장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홍장암(紅粧巖)에 비 내리는 밤 풍경을 말하는 ‘홍장야우(紅粧夜雨)’가 그 뒤를 잇는다.

경포대의 북서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는 생긴 모양이 시루와 비슷하다 하여 ‘시루봉’이라 한다. 해가 서산마루로 떨어질 무렵이면 채운(彩雲)이 시루봉 북쪽 봉우리 수평선에 비치는데 그 아름다움이 경포팔경의 하나인 ‘증봉낙조(甑峯落照)’다. 또한 경포대는 신라 화랑인 사선(四仙)[영랑, 술랑, 남랑, 안상 등 네 명의 화랑을 칭함]이 노닐던 곳이다. 고요하고 달 밝은 저녁이면 바둑을 두고 퉁소를 불며 산자수명한 경관에 도취되었던 사선의 신선경(神仙景)을 회상하는 ‘환선취적(喚仙吹笛)’ 역시 팔경의 하나다. 경포팔경은 신라 불교 전성기의 인경 소리 은은히 들려오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한송모종(寒松暮鍾)’으로 마무리된다.

경포팔경은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경포대경포 호수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인 사실과 그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경포 호수의 습지 조성과 관광 기반 시설의 확충 등으로 누정 현황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다. 경포 바닷가 송림 내에 있었던 월하정은 소유주의 관리 소홀로 건물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유지되다가 대단위 숙박 시설이 세워짐에 따라 완전히 소멸되었고, 반대로 옛날 경포 호수 남쪽에 있었던 환선정(喚仙亭)은 새롭게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환선정경포팔경에도 나오는 정자로 16세기 후반 또는 17세기 초에 소멸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2016년 옛 터 자리에 새롭게 정자를 지어 경포팔경 중 ‘환선취적’의 정취를 다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5.06.04 내용 수정 안렴사 박숙->존무사 박숙정으로 수정(20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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