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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371
한자 江陵地方農樂-民謠
영어의미역 Farmers' Music and Folk Songs of Gangneung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기설

[정의]

강릉 지역에서 부르고 행한 농악과 민요.

[개설]

-그 장단에 실린 뜻은 -강릉의 농악과 민요

농악과 민요는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이 농경 공동체 사회에서 수행했던 역할은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음악이 담당하는 그것과 똑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음악은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굵직굵직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음악이다.

하지만 농악과 민요는 오늘날의 음악이 수행하는 역할과 더불어 더욱 실용적인 목적과 제의적인 목적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가끔씩 무슨 공연이 있을 때 연주되곤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듣고 즐기기는커녕 들어볼 기회조차 제한되는 농악과 민요. 강릉 지방의 농악과 민요가 가진 특징을 살펴보면서 옛 음악과 친해지는 계기를 마련해 보자.

-강릉의 농악이 가진 특징-

강릉농악[중요무형문화재 11-라호, 1985년 12월 1일 지정]은 어느 한 마을의 농악이 아니라 강릉 지역 전체 농악의 내용을 포괄하여 연출한 것이다. 강릉 농악대는 문화재 관리국에서 지정한 보유자[예능 보유자- 박기하 1985년에 지정, 김용현 1989년에 지정], 보조자[정희철, 1990년 보유자 후보로 지정]와 강릉단오제의 농악경연대회에서 선발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릉 농악대에는 두산동농악대, 월호 평동 농악대, 저동 농악대, 사천 답교 농악대가 있다. 이들은 농기, 풍물, 풍물패, 운영 조직 들을 독자적으로 갖추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각각 마을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운영된다.

강릉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 밖의 농악대로는 성산 초등학교 오봉산 농악대, 성산 초등학교 칠봉산 농악대, 명주 초등학교 농악대, 강릉 초등학교 농악대, 경포 초등학교 농악대, 사천 초등학교 농악대, 강릉 중앙 고등학교 농악대, 강릉 농협 주부 대학 동창회 농악대, 가톨릭 관동 대학 유네스코 학생회 농악대, 교동 농악대 등이 있다.

농악대는 ‘농기(農旗)’를 드는데, 강릉 농악대의 농기는 강릉을 대표하는 ‘대표 농기’와 각 농악대를 대표하는 ‘마을 농기’가 있다. 대표 농기는 마을 농기보다 색깔이 더 하얗고, 크기는 약간 작다. ‘강릉 농악 보존회’라는 글씨가 써 있고, 가장자리에 검정 수술을 달았다. 마을 농기는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삼각술을 달고, 밑에는 청, 황, 홍의 삼색술을 길게 달았다. ‘OOO 농악대’란 글씨가 씌어 있다.

강릉농악은 대부분 외가락으로 되어 있고 가락이 단조로우며 소박한 맛이 있다. 복색은 경상도 농악과 비슷하나 머리에 쓴 벙거지가 특이하다. 예컨대 벙거지 위에 짚으로 엮어 문종이를 붙인 상모지가 달려 있는데 이는 강릉 주변에서만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또 무동들이 쓰는 고깔은 다른 지방에 비해 꽃송이가 작으면서도 많이 달려 있다. 강릉농악은 전국 농악 가운데 가락이 가장 빠르고, 소고와 법고가 구별되고, 무동춤과 농사풀이가 이색적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강릉농악의 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법고, 날라리[호적 또는 태평소]로 구성된다. 또 연행을 위해서는 농기수 1명, 꽹과리 3명, 징 2명, 장구 2명, 큰북 8명, 소고 8명, 법고 8명, 무동 8명, 날라리 1명의 인원이 참여한다.

강릉 농악대의 복색을 살펴보면, 먼저 농기수는 한복에 청, 홍, 황 삼색 띠를 양 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고깔을 쓰고 있다. 날라리는 농기수와 복장이 같다. 상쇠는 한복에 남색 등지기를 걸치고 삼색 띠를 맨 후 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부쇠는 그냥 한복에 삼색 띠를 매고 상모지를 단 벙거지를 쓴다. 징수는 한복에 삼색 띠를 매고, 상모지가 달리지 않았으면서 길이가 짧고 폭이 넓은 방망이 상모를 단다. 장고수와 북수도 징수와 복장이 같다. 소고수는 징수의 복장과 같은데, 다만 수건을 머리에 쓰며 퍽을 단 벙거지를 쓰는 것이 다르다. 법고수는 한복에 삼색 띠를 매고, 긴 상모지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무동은 여자 차림을 하는데, 붉은 치마와 노랑 저고리에 남색 쾌자를 걸친 후 색 띠를 매고 고깔을 쓴다. 손에는 수건을 든다.

농악에서 음악의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쇠가락’이다. 강릉농악의 쇠가락은 일곱 종류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1) 1채- 2박을 한 장단으로 뽑고 징을 2박에 한 번 치는데 마당굿에서 흔히 쓰이는 쇠가락이다. 3분박 매우 빠른 4박(8분의 12박자)로 꽹과리는 ‘갱-개, 갱-개, 갱-개, 갱-개’ 하며 치고, 징은 첫째, 셋째 박에 1점씩 친다.

(2) 2채- 상모 가락에 연결해서 쓰인다. 2분박의 좀 빠른 4박자[4분의 4박자]이며, 꽹과리는 ‘갱-개 개 갱-갱-개 개 개-’ 하며 치고 징은 첫째, 셋째 박에 1점씩 친다.

(3) 3채- 3분박 좀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고, 꽹과리는 ‘갱-개 갱-개 갱-개 갯 깽-’ 하며 치고, 징은 첫째, 셋째 박에 치는 것이 원칙이나, 첫째, 셋째 박 또는 첫 박에도 친다.

(4) 4채- 3분박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고, 꽹과리는 ‘갱-개 개 개 개 갱-개 개 개 개’ 하며 치고, 징은 첫 박과 넷째 박에 1점씩 친다.

(5) 길놀이[신식 행진 가락]- 2분박 좀 빠른 4분박[4분의 4박자]이고, 꽹과리는 ‘갠 -지 개 개, 갠-지 개 개, 개 개 갱 개 개 갱, 갠-지 개 개’ 하며 두 장단을 치고, 징은 첫 장단에는 첫째, 셋째 박에 1점씩 치고, 둘째 장단에는 첫째, 둘째, 셋째 박에 1점씩 친다.

(6) 굿거리[8채]- 춤 출 때 치는 가락으로 ‘갱 개 개 갱 갱 개 개 갱 갠-지 갱 깽 깽’ 하며 치는데 3분박 좀 느린 4분박[4분의 12박자]이다. 징은 첫 박에 1점 친다.

(7) 12채[구식 길놀이 가락]- 행진할 때 ‘갯 깽-갠-지 갱 갠-지 갱 깽깽 갱개개갱갱개개갱 갱개개갱 갱-갱 개갱 개 개 개갱 개갱 개개 갱 개갱 개개갱 갯 깽깽’ 하며 치는 가락으로 3분박 보통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다.

농악의 춤사위는 춤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펼쳐진다. 소고춤을 출 때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소고를 앞에서 한번 치고, 몸을 좌우로 틀면서 앞으로 약간 뛰어 나간다. 법고춤도 이와 마찬가지다. 농악의 꽃인 열두 발 상모는 뒤에서 손을 합치고 외사, 뒤에서 손을 합치고 양사, 땅에 엎드려 외사의 순서로 진행된다. 강릉농악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동춤은 무동이 양손에 청색 수건을 쥐고 좌우로 흔들며 춘다. 오른손 바닥과 왼손 바닥이 서로 마주 보게 하고, 안으로 모아지는 동작을 번갈아 가면서 하는 가운데 중앙 양옆으로 벌려 흔들며 춤을 춘다. 농악을 이끄는 상쇠는 꽹과리를 들고 채를 8자형으로 돌리며 외상모와 양상모, 꼭두상모를 하면서 장기를 뽐낸다. 장고도 장고를 위로 올리며 좌우로 춤추고, 외방망이 치기와 양방망이 치기를 한다.

-강릉농악이 쓰이는 경우-

강릉의 농악은 각종 세시 풍속에서 정례적으로 연주된다. 농악은 그 이름처럼 전통적인 농경 문화와 공동체 문화에 근거하고 있어서, 일 년 중 농사가 진행되는 순서에 따라 농악도 연주되고 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는 예전처럼 굵직한 농사 일이 있을 때마다 농악패가 모여 공연을 하고 한바탕 노는 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농악의 공연 형식과 가락에 담겨 있는 마음, 즉 공동체의 평안을 기원하고 풍요를 바라는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다르지 않다.

일 년 중 처음으로 농악이 연주되는 것은 정월 보름부터 3, 4일간 진행되는 지신밟기[고사반]인데 농악대가 집집마다 농악을 치며 고사를 지낸다. 지신을 밟기 전에 당에 가서 서낭굿을 하고, 서낭기[농기]를 든다. 풍물을 치면서 집집에 들러 문굿을 치고, 고사반을 한 후 마당굿을 한다. 농악대가 지신밟기를 하는 집의 대문 앞에 도착하면 가락을 잠시 멈추고 상쇠가 문전 굿풀이를 한다. 농악대가 마당 앞에 와서 한바탕 놀고 나면 안주인은 고사상을 차린다. 고사상 앞에서 바깥주인이 절을 두 번하고 물러나면 상쇠가 고사상 앞에 나가 절을 두 번 하고 덕담고사를 한다. 덕담고사를 마치면 농악대는 부엌으로 들어가 조왕굿을 친다. 사설은 없고 3채 가락만 신나게 친다. 이것이 끝나면 농악대는 뒤꼍 장독대로 가서 장독대를 둘러싸고 3채로 한바탕 굿을 친 다음 사설을 한다. 장독대가 끝나면 우물 차례. 농악대는 우물을 사이에 두고 3채로 굿을 한 바탕 한 다음 상쇠가 용왕굿 풀이를 한다.

이런 지신밟기뿐 아니라 마을에 기금이 필요한 일이 생겨도 농악대가 집집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하고 기금을 걷는다. 이것이 걸립굿인데, 서낭기를 앞세워 풍물을 치며 서낭에 가서 제사상을 차려 잔을 올린 후, 농악을 치며 절을 두 번하고 서낭굿을 친다.

힘든 농사일을 할 때 신나는 농악의 리듬이 있다면 솟구치는 흥 덕분에 몸의 고됨을 잊을 수 있다. 농사 중에서도 힘든 과정이 진행될 때는 농악이 수반되곤 했다. 모를 심을 때[못질], 김을 맬 때[김질], 들에 나가고 들 때 농악을 치는데 이 경우의 농악을 ‘질먹기’라고 한다. 이때 농악구성은 농기, 날라리, 꽹쇠[꽹과리] 2명, 징 1명, 장고 1명, 큰북 1명으로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편성된다.

질을 먹을 때, 걸립굿을 할 때, 봄철 화전놀이를 할 때 큰 마당에서 갖가지 농악을 벌인다. 이것이 마당굿이다. 마당굿은 규모가 큰 만큼 절차와 구성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마당굿은 인사굿으로 시작하는데, 서낭기, 날라리, 상쇠, 풍물, 소고, 법고, 무동 순으로 농악대가 12채 길가락을 치면서 한 줄로 서서 놀이판으로 들어온다. 다음은 두루치기. 상쇠가 풍물패를 데리고 먼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소고, 법고, 무동이 뒤를 따라서 큰 원을 만든다. 4채 가락에 맞춰 큰 원을 이루면 3채, 2채, 1채로 가락이 변하면서 발을 맞춘다[발맞추기]. 여기서 가락이 4채로 바뀌면 서낭기가 끝 쪽 무동 앞에 가서 전체 대형을 중앙으로 말아 들인다. 대형이 완전히 말리면 무동들이 자리에 앉고, 상쇠가 사설을 한다. 사설이 끝나면 반절을 하고, 무동들이 일어나서 서낭을 놀린다. 그런 다음 농악대들이 큰 절을 두 번 하고 논다[서낭 모시기]. 상쇠가 앞장서서 들어 올 때의 역순으로 풀면서 큰 원을 만든다. 큰 원이 만들어지면 상쇠가 앞장서서 멍석말이를 했다가 풀어 나온다. 멍석이 다 풀어지면 다시 큰 원을 만든다[7채 멍석말이]. 풍물, 소고, 법고, 무동들은 자기들끼리 작은 원을 4개 만들고, 상쇠는 이들 원 중앙에 서서 가락을 치면서 놀다가 제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서면서 한 바퀴 빙 돈다. 이 대목은 오방에 있는 지신을 밟아주는 순서다[오방 지신밟기].

마당굿에는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노는 황덕굿이 있다. 황덕굿은 세 가지 정도의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무동 황덕굿인데 대형이 만들어지면 무동들이 놀이판 중앙으로 들어가서 원을 이루어 놀다가 제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서면서 한 바퀴 돌고, 다시 가락에 맞춰 풀어 나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음이 법고 황덕굿. 법고패가 놀이판 중앙에 들어가 한바탕 논다. 무동패가 법고패 자리로 와서 놀다가 법고 황덕굿이 끝나면 법고패의 뒤를 따라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소고 황덕굿인데 무동 황덕굿, 법고 황덕굿과 같이 연희된다.

마당굿에서 돋보이는 것은 농사풀이다. 일 년 중 농사의 과정을 농악으로 재현한 것인데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흥미롭다. 농사풀이의 시작은 가래질로 열린다. 법고들이 놀이판으로 들어가고 법고 자리에 무동들이 선다. 법고들은 3명[2명]씩 한 조가 되어 1채에 맞추어 가래질 시늉을 하는데 3명은 가래질을 하고, 1명은 땅을 밟아 주고, 1명은 땅을 고르는 동작을 한다. 가래질을 했으면 논을 갈 차례. 논갈이가 시작된다. 법고와 소고가 4채에 맞춰 2열로 선다. 법고쟁이는 한 손에 법고, 한 손에 채를 들고 앉아서 소가 되고, 소고잽이는 법고쟁이의 상모꼬리를 잡는다. 다음은 못자리 누르기다. 무동들이 4채로 들어서고 소고 앞에 한 줄로 선 다음 3채에 맞춰 엎드려 뒤로 물러가면서 못자리를 눌러 주는 시늉을 한다. 못자리를 눌렀으면 볍씨를 뿌릴 차례. 소고가 놀이판으로 들어가 2명이 마주보고 서서 무동이 법고 자리로 이동한다. 가락에 맞춰 소고잽이들은 소고를 씨앗망태로 삼아 볍씨를 뿌리는 시늉을 한다. 볍씨를 뿌렸으면 모를 찐다. 무동, 소고, 법고쟁이들이 놀이판으로 들어가 2열로 선다. 소고, 법고쟁이들은 앉아서 모를 찌고, 무동들은 뒷줄에서 못단을 옮기는 시늉을 한다.

이제 모를 심을 차례다. 소고, 법고쟁이, 무동들이 놀이판을 한 바퀴 돌아서 앞줄에 소고와 법고쟁이는 엎드려 모를 심고, 뒷줄의 무동은 모를 날라다 준다. 모를 심은 후에는 논을 맨다. 풍물잽이만 빼고 모두 놀이판으로 들어가 둥글게 선다. 상쇠가 원 안으로 들어가 선창으로 논매기 노래를 메기고, 나머지는 후창을 한다. 원을 좁혀가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손을 들고 ‘와’ 하고 소리를 지른다.

논을 맨 후엔 멍석말이가 이어진다. 상쇠가 앞장서서 멍석을 말아 들어간다. 다 말아지면 한바탕 놀고 난 다음 원 위치로 풀어 나온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매놀이다. 소고, 법고, 무동들이 놀이판을 한 바퀴 돌고, 소고잽이는 원 위치로 돌아가고, 법고와 무동들은 2열로 놀이판으로 들어간다. 짝을 지어 마주 앉아 놀다가 법고가 무동을 한 바퀴 돌고, 다음에는 무동이 바꿔서 법고를 한 바퀴 돈다. 무동과 법고가 노는 사이로 소고들이 엇갈려 가면서 돌아나간다.

이제는 벼를 벨 차례. 먼저 벼를 베기 위해 낫을 간다. 소고, 법고, 무동들이 놀이마당을 한 바퀴 돌아 각각 제자리로 가고 법고만 놀이판 안에 들어가 앉아서 소고채로 낫을 가는 시늉을 한다. 벼를 벨 때는 법고쟁이들이 벼를 베어 묶어서 뒷줄에 있는 무동들에게 준다. 벼를 다 벤 다음에는 소고, 법고, 무동 순으로 한 바퀴 돌아 제 위치에 선다. 다음은 벼광이기다. 풍물을 제외한 모두가 놀이판을 한 바퀴 돌아 제 위치로 가고, 법고 2명이 놀이판 안으로 들어와 말뚝박기를 한다. 한 사람이 망치를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하면, 한 사람은 차차 앉으면서 말뚝 박히는 시늉을 한다. 이후 순서는 벼 타작. 북 2개로 탯돌을 만들고, 법고쟁이 3명이 한 조가 되어 태질을 하고, 소고잽이는 뒷줄에서 도리깨질을 한다. 타작을 끝낸 벼는 볏단을 모은다. 무동, 법고, 소고들이 원형으로 둘러싼다. 안쪽으로 무동들이 앉아서 나락무더기를 상징하고, 그 외부에 소고와 법고들이 나락을 끌어 모으는 시늉을 한다. 단으로 엮은 벼를 방아로 찧는 순서가 그 다음 차례다. 법고 3명이 방아를 만드는데 2명이 마주 잡은 손 위에 뒤로 누워서 두 다리는 방아다리가 되고, 머리는 공이가 된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농악대가 노는 마당이 펼쳐진다. 오고북놀이가 먼저인데, ㅁ자형으로 만들어진 대형에서 오고북[북 3개, 장구 2개]이 제일 안쪽에 위치하여 북 장단과 쇠가락을 교차시킨다. 오고북이 제일 안쪽에 둘째 줄에 무동, 셋째 줄에 법고, 넷째 줄에 소고가 에워싼다. 팔도진 놀이도 이어진다. ㅁ자 대형이 4채 장단에 맞춰 S자형으로 풀어나간다. 이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상모돌리기 순서가 진행된다. 먼저 삼동고리다. 제일 아래쪽에 4명이, 그 위에 2명, 맨 위에 1명이 앉는다. 풍물잽이들의 가락에 맞춰 제일 아래층이 서고, 두 번째 층, 세 번째 층이 순서로 서고, 맨 위층에 있는 사람이 상모를 돌린다. 앉을 때는 설 때의 역순으로 앉는다. 하이라이트인 열두 발 상모가 그 다음이다. 열두 발 상모를 쓰고 놀이판 중앙에 나가 노는데, 2채에 맞춰 뒤에서 손을 합치고 외사, 뒤에서 손을 합치고 양사, 땅에 엎드려 외사 등의 동작을 한다. 이어지는 가락은 굿거리. 무동을 제일 안쪽으로 하여 모여들었다가 3채, 2채, 1채 굿거리로 다시 풀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뒤풀이에서는 구경꾼들과 농악패가 어우러져 노는데 형식은 따로 없다. 이때쯤에 이르러서는 구경꾼과 농악패의 구분이 없어지고 그저 흥겨움만 남아 마당을 가득 채운다.

-강릉 농악보존회-

회장: 정문교. 부회장: 정희철. 사무국장: 김기원

기능보유자: 박기하 1985년 상쇠 지정, 김용현[작고] 1989년 부쇠 지정, 정희철 1990년 보유자후보 부쇠 지정

조교: 차주택 1992년 지정, 최동규 1996년 지정

-강릉의 민요, 「오독떼기」-

민요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설움과 괴로움을 그대로 담고 있는 노래다. 일할 때 부르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한바탕 흥겹게 놀거나 특별한 민속행사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있다. 강릉 민요는 농사를 지을 때 부르는 노래, 산에서 등짐을 지고 내려오면서 부르는 노래, 유희를 하며 부르는 노래, 고기잡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면서 부르는 노래, 어린아이를 재우면서 부르는 노래, 단오 때 국사서낭님을 맞이하면서 부르는 노래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노래가 바로 「오독떼기」다.

「오독떼기」는 강릉 지역에서 논에서 김을 맬 때 부르는 농업노동요의 하나다. 남쪽으로 옥계·망상, 북쪽으로 양양군 현남까지 분포되어 불린다. 농요는 작업과정에 따라 각기 다른데, 논 맬 때 부르는 노래가 가장 다양하고, 음악적으로도 세련되어 있다. 강릉 지역의 대표적인 논매기 소리인 「오독떼기」 가운데 ‘「강릉 학산 오독떼기」’는 1988년 5월 18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강릉 학산 오독떼기」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서 전승되는 「모찌기 소리」, 「모내기 소리」, 「김매기 소리」, 「벼베기 소리」, 「타작소리」 등의 농요 일체를 말한다. 하나의 완결된 희곡적 스타일과 구성을 갖추고 있고, 집단 노동요가 많은 것이 장점이며 특징이다.

「오독떼기」는 여러 가지의 유래를 가지고 있다. 신라 때 화랑들이 강릉 지역을 돌며 풍류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국선(國仙)들이 부르던 노래가 곡조만 살아나 전해졌다는 말도 있다. 그 밖에 다섯 번 꺾어 부르는 노래, 동·서·남·북·중앙의 5독(五瀆)을 떼기[개척]한다는 뜻, ‘오’는 신성, 고귀를 의미하고, ‘들[떼기]’은 들판을 개간한다는 의미로 ‘신성한 들판을 개간한다.’는 뜻이라는 설도 있다.

「학산 오독떼기」는 모심기 소리[자진아라리]로 시작한다. 2소박(小拍)과 3소박이 한데 섞인 혼소박(混小拍)의 노래로 메기는 소리, 받는 소리로 구성된다. 독창으로 메기는 부분은 곡조와 사설이 가변적이고, 여럿이 함께 노래하는 받는 소리는 ‘아리아리 아리아리 아라리요, 아라리 고개로 넘어간다.’를 후렴으로 반복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김매기인데 김 매기 중 제일 먼저 부르는 것이 「오독떼기」다. 논 맬 때 부르는 김매기 소리인 「오독떼기」는 농요 가운데 가장 다양하고 음악적으로도 세련되었다. 김을 맬 때는 「오독떼기」와 「꺾음 오독떼기」를 비롯하여 잡가, 「사리랑」, 「담성가」 등을 부르며 김매기를 마칠 때는 「싸대」를 부른다. 「꺾음 오독떼기」는 「오독떼기」의 변주곡으로 어느 정도 규칙적인 리듬이 쓰이고, 고음에 가성을 사용하여 음악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오독떼기」를 다 부르고 나서 이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독떼기」를 부르는 중간에 섞어 부른다. 잡가는 원래 전문예능인들의 노래를 말하는데 학산에서 부르는 잡가는 사당패들이 부르던 노래가 마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리랑」과 「담성가」는 각각 노래의 후렴구절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 사리랑의 의미는 불확실하고, 담성가는 ‘듬성듬성’ 과 같은 뜻으로 보인다. 논매기 때 마지막으로 부르는 소리가 「싸대」다.

다음은 벼 베기[불림소리]다. 논에서 벼를 베어 묶으며 부르는 노래로 여럿이 함께 일하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부른다. 이 노래는 앞소리와 뒷소리의 구별이 없으며 자유로운 리듬으로 노래하는데 노래 한 절은 벼 한 단을 베어 묶는 작업과 일치한다. 「타작소리」[마뎅이 소리, 도리깨질 소리]는 도리깨질을 하며 부르는 전형적인 노동요로 앞소리꾼이 메기면 뒷소리꾼들이 받는다. 메기는 소리는 그 때마다 다른 기사를 일정한 가락에 얹어 부르고 받는 소리는 가사와 가락이 고정적이다.

-강릉 학산 오독떼기 보존회-

회장: 최종설. 부회장: 최두규, 임성규. 총무: 이종협

회원: 이상욱, 조규완, 권태현, 김진복, 함영길, 조돈신, 신재봉, 정해준, 최용길, 정귀화, 김영득, 손병선, 강순옥, 박봉희, 이승준, 황상근, 김봉경, 윤영학, 이택연, 이건규, 김원기, 박지현, 홍순화, 남정기, 김근한, 김양수, 윤미자, 조영남, 심춘옥, 이상단, 윤영희, 신순분, 김선옥, 정문자, 김영자, 황근희, 최종숙, 이연수, 김선대, 김두용, 조각현[작고], 김세중[작고]

-예능 보유자-

1. 지정: 1988년 5월 18일 강원도 무형 문화재 제5호 지정

2. 고증자: 황덕억, 김덕문, 김세중, 황석관, 정덕화, 조각현

3. 보유자

조영원[작고] - 1988년 5월 18일 인정

조경재[작고] - 1988년 5월 18일 인정

동기달[작고] - 1988년 5월 18일 인정

최찬덕[작고] - 1991년 5월 9일 인정

윤흥용 - 1991년 5월 9일 인정

김철기 - 1988년 5월 18일 인정

최삼영 - 2003년 4월 25일 인정

4. 전수 교육보존자

구기오[작고] - 1992년 6월 9일 인정

조규은[작고] - 1992년 6월 9일 인정

정완화 - 2003년 4월 25일 인정

5. 전수 장학생

김근한 - 2003년 12월 29일 인정

권태현 - 2003년 12월 29일 인정

임성규 - 2003년 12월 29일 인정

함영길 - 2003년 12월 29일 인정

농악과 민요는 원래 생활 속에서 불리던 음악이다. 힘든 농사일을 할 때, 명절 때, 공동체에 어떤 일이 있을 때 농악과 민요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농악과 민요는 그런 본래의 기능을 떠나서 특수한 경우나 ‘공연’, ‘연희’를 위해 분리된 연희 장르가 되었다. 그런 추세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농사일도 형태가 변했고 우리 모두의 생활도 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농악과 민요를 가까이 하던 마음마저 박제된 공연 속에 묻어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농악과 민요에 담겨 있는 서러움과 기쁨, 애환과 즐거움마저 잊어버린다면, 그리고 음악에 그 모든 정서를 실어 보내며 삶의 고단함을 잊으려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마저 잊어버린다면, 오늘날 도시의 생활은 아무런 기초도 배경도 없이 얇은 종이 위에 그려진 낙서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4.09 [개설] 수정 강릉농공고등학교를 강릉중앙고등학교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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