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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270
한자 高等學校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교육기관

[정의]

대구광역시에 있는 중등 보통 기관 및 실업 전문 교육 기관.

[개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는 중학교 졸업 이후에 진학하게 되는 후기 중등교육기관으로 실업계와 인문계가 있다. 형태는 복선형이지만 인문계, 실업계 모두 대학을 진학할 수 있어 단선형 학제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1974년 평준화가 도입되어 도시의 고등학교는 무시험 전형이지만, 면 단위 지역의 고등학교는 아직도 시험 선발로 입학한다.

대구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학교는 1899년에 설립된 흥화학교 대구지교와 달성학교였다. 두 학교 모두 관민이 주도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이후 1906년 계성학교가 개신교 전도사에 의하여 설립되어 영남 지역 최초의 근대 중둥교육기관이 되었다.

[개항기(1899~1910)]

1. 대한제국기[1899~1904]

대구 지역에서 근대 학교가 설립된 시기는 1899년이며, 흥화학교(興化學校) 대구지교(大邱支校)와 달성학교(達城學校)가 세워졌다. 두 학교 모두 관민이 주도하여 설립한 학교로 모두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흥화학교 대구지교는 1899년 6월 최처규(崔處圭)가 “신진개도(新進開道)”를 내세우며 설립하였다. 전 장교청(將校廳)을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하고, 학생 40여 명을 선발하여 영어·산술·지지·역사 등을 가르쳤다. 흥화학교는 초등교육보다는 중등교육을 지향하였다. 독립협회는 민중층의 지식을 개발하고 민권을 성장시켜야 국가 경쟁과 민족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육 보급,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와 같은 민회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층을 계몽시키려 하였다. 민중 계몽의 일환으로 독립협회는 서울에 흥화학교를 세우고 각 지방에 흥화학교 지교를 설립하였으며, 대구에서도 흥화학교 지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서울 흥화학교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흥화학교 대구지교도 이 시기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달성학교는 1899년 7월 「중학교 관제」에 따라 경북관찰부 감영 안 관청 건물에서 개교하였다. 윤필오(尹弼五), 장규원(張圭遠), 추교정(秋敎鋌) 등 10인이 발기를 하였고, 초대 교장은 경상관찰사 김직현, 부교장은 장규현[1900년 10월부터 윤필오]이었다. 명예교사로 신타니 마쓰스케[新谷松助], 명예고문으로 히자츠게 마스키치[膝付益吉]가 임명되었다. 주로 국한문, 지지, 산술, 일어 등을 가르쳤다. 심상과는 1905년 8월 27일 대구보통학교로 인계되었고, 고등과는 1909년 3월 8일 협성학교로 개칭되었다. 달성학교는 일어학교로, 일본 거류민 히자츠게[膝付]가 설립하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대구 지역에 정착한 개신교 계열은 대구 지역의 근대 학교 설립과 교육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99년 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선교사 안의와(安義窩)[미국명 James Edward Adams, 1867~1929]는 1900년 11월 교회 내 대남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2년 부해리(傅海利)[미국명 Henry Munro Bruen, 1874~1959] 선교사 부인 부마태(傅馬太)[미국명 Mrs. Martha S. Bruen]는 장인차(張仁車)[미국명 Woodbridge O. Johnson M.D] 선교사의 부인 파커(Edith M. Parker)가 운영하였던 바느질반 소녀 14명을 인계받아 대구선교지부(Daegu mission center)에서 신명여자소학교[신명학교]를 세웠다. 대남학교와 신명여자소학교는 대구·경북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기독교 계열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1906년 5월 아담스 선교사는 교회 내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를 설립하고 신입생 27명을 받았다. 1907년 10월 부마태는 동산선교기지에 중등교육기관 신명학교를 설립하였다. 1913년 3월 아담스 목사는 남자 성경반과 부인 성경반을 통합하여 대구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1914년 5월 경비 부족으로 인하여 학교 유지가 어렵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여성 독지가인 서희원(徐喜媛)김울산(金蔚山)의 후원을 받아 학교명을 대남보통학교는 ‘희원학교’, 신명보통학교는 ‘순도여자학교’로 개칭하였다. 1921년 10월 교회 내 대구 최초로 대남유치원이 설립되었다. 1926년 7월 희원학교와 순도여자학교를 합병하여 희도보통학교로 개편했다.

2.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

대구의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은 대구광문사, 대구광학회와 같은 애국계몽운동단체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 단체와 회원들은 교육을 보급하여 민지(民智)를 개발하고, 민기(民氣)를 진작하여 자치·자강을 이룩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계몽단체가 주도한 교육운동에 동참하였던 인사나 지역 유지들이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06년 10월 대구 유지들이 대구사범강습소를 세웠다. 1907년 8월 서상하는 협성학교를 설립하였다. 애국계몽운동기 대다수 학교는 사립 중등교육기관이었지만, 1909년에는 공립 농림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일본의 교육정책 목표는 한인을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은 네 번에 걸쳐 「조선교육령」을 제정, 공포하여 한인을 일본의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도구로 길러 내고자 하였다. 1911년의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는 보통교육[현 초등교육] 수업 연한 축소, 보통교육과 기술교육[실업학교, 전문학교] 위주로 학제를 편성, 대학교육 불허 등 교육 기회를 축소하고 한국인의 우민화 교육을 시행하였다. 한편,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실업학교·사립학교 등의 교육규칙과 학교 관제 등이 공포되면서 한인 교육의 주도권을 한인이 아닌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일제의 식민정책에 필요한 도구로 실업교육 관련 중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중등교육기관의 현황을 살펴보면, 공립에는 대구중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대구고등여자보통학교, 대구상업학교, 대구사범학교, 대구농림학교가 있었으며, 사립에는 계성학교, 교남학교, 협성학교 등이 있었다.

[현대]

1. 1940년대 중후반[1945년 8월 15일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대구 지역의 중등교육기관은 총 13개교였다. 공립에는 대구공립농림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대구여자중학교, 경북공립중학교, 대구공립중학교, 대구공립상업학교, 대구사범학교, 대구공립공업중학교, 경북여자중학교, 대구여자상업학교[현 대구제일여자상업고등학교] 등 9개교, 사립에는 계성중학교, 대륜중학교, 오산농림실수학교, 대성중학교 총 4개가 있었다.

해방공간기에는 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중등교육기관을 명칭을 변경하여 한국인 교육기관으로 편제하였다. 학제 역시 6-4-2~4-4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중등학교 내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분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46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가 개편되어 경북대학교부속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고등여학교는 대구여자중학교[현 대구일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중학교대구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경북여자중학교[현 경북여자고등학교], 1946년 오산불교학교는 능인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46년에는 영신중학교, 대건중학교, 1947년에는 영남중학교, 1949년에는 효성여자중학교, 1949년에는 효성여자고등학교가 신설되었다.

1940년 후반 대구 지역에는 모두 19개의 중등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대구 지역에서는 전국 최초로 이영식 목사가 특수교육기관인 광명학교영화학교를 1946년 설립 운영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49년까지 총 학교 수는 19개교, 학생 수는 3만 2000여 명, 교원 수는 600여 명이었다.

2. 1950년대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법령 제86호]가 개정되어 1950년 3월 공포됨에 따라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6-3-3-4제로 확립되었다. 따라서 이 교육제도에 맞는 중등학교 교과과정이 제정되어야 하였다. 이에 따라 1950년에는 중등학교가 28개교였으나 1959년에는 63개교로 늘어났다. 중학교가 33개교로 학생 수 2만 3431명, 교원 수 676명이었다. 고등학교는 30개교로 학생 수 2만 3292명, 교원 수 746명이었다.

3. 1960년대

1966년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인간개조운동을 교육에서 강조하였다. 이것은 1963년 2월 15일 교육과정의 전면 개편을 가져왔다. 또한 1964년 도 단위 교육자치제가 부활하면서 민족 중흥과 국가 발전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었다. 특히, 1968년 국민교육헌장의 선포,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등이 실시되면서 중등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바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분리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69년 말 대구 지역 고등학교 현황을 보면, 인문고등학교 20개교, 교원 수 703명, 학급 수 389학급, 학생 수 2만 3519명이었다. 실업고등학교 수는 14개교, 교원 수 602명, 학급 수 273학급, 학생 수는 1만 5961명이었다.

4. 1970년대

1970년대는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으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시기였다. 특히, 중등교육 평준화가 시작되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중학생이 급증함에 따라 1972학년도에는 고등학교 입시가 더욱 심각하여졌다. 일류 고등학교 입학 경쟁으로 인하여 과열 과외와 재수생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다. 결국 1973년 2월 인문계 고등학교는 학군제, 과정별 지원, 추첨 배정으로 선발한다는 고교입시제도 개선 방안이 발표되었다.

대구는 인천, 광주와 함께 1975년부터 개정 고교입시제도가 적용되었다.1970년 대구 역시 중학교 무시험제 실시로 중학교 지원 학생을 고등학교가 전원 수용하여야 하였다. 신설 학교 부족으로 학급당 수용 인원이 평균 61~70명이었고, 고등학생을 전원 수용하지 못하여 1979년에는 고등학교 재수생이 약 4,000명에 이르렀다.1979년 대구의 고등학교 현황을 보면, 인문계 고등학교 23개교, 교원 수 1,312명, 학급 수 755학급, 학생 수 4만 6808명이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는 17개교, 교원 수 1,147명, 학급 수 674학급, 학생 수 4만 859명이었다. 대구시 인구가 100만에서 160만으로 증가한 것과 비교하여 보면 고등학교 진학률은 큰 폭으로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5. 1980년대~1990년대

1980년 7월 30일 학교교육 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법안 등을 포함한 7·30교육개혁조치가 시행되면서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한 전면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대구 지역 교육 현황을 보면 중학교 49개교, 교원 수 2,127명, 학급 수 1,519학급, 학생 수 10만 4784명이었다. 1991년에는 중학교 75개교, 교원 수 4,178명, 학급 수 2,333학급, 학생 수 12만 2518명이었다.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 발족 이래로 교육 여건 개선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한 결과 학급당 교원 수는 1.79명이고, 학급당 수용 학생 수는 50.6명이었다.

[현황]

2020년 현재 대구광역시의 고등학교 현황을 보면, 국립고등학교 1개교, 공립고등학교 43개교, 사립고등학교 48개교로, 총 92개교가 있다. 지역별로 보면, 남구 7개교[사립고등학교 6개교, 공립고등학교 1개교], 달서구 23개교[공립고등학교 14개교, 사립고등학교 9개교], 동구 11개교[공립고등학교 4개교, 사립고등학교 7개교], 북구 16개교[공립고등학교 7개교, 사립고등학교 9개교], 서구 6개교[공립고등학교 4개교, 사립고등학교 2개교], 수성구 17개교[공립고등학교 7개교, 사립고등학교 10개교], 중구 4개교[국립고등학교 1개교, 공립고등학교 1개교, 사립고등학교 2개교], 달성군 8개교[공립고등학교 5개교, 사립고등학교 3개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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