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318
한자 禹成圭
영어공식명칭 Woo Sungkyu
이칭/별칭 우해규(禹海圭),성석(聖錫),경재(景齋),경도(景陶)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0년연표보기 - 우성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8년 - 우성규 선공감가감역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우성규 상의원주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86년 - 우성규 현풍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88년 - 우성규 영월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89년 - 우성규 칠곡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92년 - 우성규 돈녕부도사 제수
몰년 시기/일시 1905년연표보기 - 우성규 사망
출생지 월촌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월촌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인산정사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18길 29[상인동 1022]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단양(丹陽)
대표 관직 영월부사|칠곡부사

[정의]

개항기 대구 출신의 문관.

[가계]

우성규(禹成圭)[1830~1905]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자는 성석(聖錫), 호는 경재(景齋) 또는 경도(景陶)이다. 어릴 적 이름은 우해규(禹海圭)이다. 할아버지는 우재길(禹載吉)이고, 아버지는 우진권(禹鎭權)이다. 어머니는 하학필(夏學必)의 딸 달성하씨(達城夏氏)이다. 부인은 채석한(蔡錫翰)의 딸 인천채씨(仁川蔡氏)이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우성규는 1865년(고종 2) 만동묘(萬東廟)를 훼철하라는 조정의 명에 반대하며 성균관 유생들과 더불어 상소하여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밝히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78년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와 상의하여 화지산(花枝山) 북쪽 갈평(葛坪)에 정자를 짓고 퇴계 이황의 「관음원에서 비를 피함(觀音院避雨)」 시에서 “군(君)을 생각하는 한 치의 내 마음 막을 수 없네(不隔思君一寸腸)”라고 한 시구의 뜻을 취하여 사군정(思君亭)이라 하고 퇴계를 경모하는 뜻으로 ‘경도(景陶)’를 호로 삼았다. 1885년 상의원 주부, 1886년 현풍현감이 되어 도동서원을 방문하고 김굉필의 묘를 참배하고 매월 『소학』을 강론하였다. 1886년 영덕현령, 예안현감, 임천군수, 1888년에는 영월부사가 되어 장절사(壯節祠)를 중수하였다. 1889년(고종 26) 칠곡부사가 되어 향음주례를 행하고 학규를 세우고 강회를 열었다. 1892년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명성황후가 승하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과 교유하며 낙동정사(洛東精舍)와 동계서당(東溪書堂)에서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후학의 교육에 힘써 많은 제자를 길렀다. 만년에 문하생이 많아지자 덕동서원(德洞書院) 옛 터에 인산정사(仁山精舍)를 세워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학문과 저술]

우성규의 저술로는 1911년 간행된 『경재집(景齊集)』 14권 5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05년 제자들이 우성규를 추모하여 달서구 상인동 1022인산정사(仁山精舍)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