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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응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94
한자 徐膺玧
영어공식명칭 Seo Eungyoon
이칭/별칭 광보(光輔),이은(伊隱)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37년연표보기 - 서응윤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09년연표보기 - 서응윤 사망
출생지 만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만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지도보기
묘소|단소 서응윤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반정리
성격 효자
성별 남성
본관 달성(達城)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효자.

[가계]

서응윤(徐膺玧)[1737~1809]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광보(光輔), 호는 이은(伊隱)이다. 이조판서 남은(南隱) 서섭(徐涉)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서응윤은 1737(영조 13)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너그럽고 인자하였으며 효도하는 마음이 돈독하였다. 여섯 살 때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하고, 충성은 마땅히 목숨을 다하라[孝當竭力, 忠則盡命]”라는 구절을 읽고 목숨을 다하여 효도하리라 다짐하였고, 열 살 때 『논어(論語)』를 배웠는데 문효 조(問孝條)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세 번 반복하여 읽었다고 한다.

서응윤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봉양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사망하자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6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겨울에 홑옷을 입고 있을 때 까마귀가 움막에 들어와 날개로 몸을 감싸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응윤은 1809(순조 9) 사망하였다. 저술로는 「효행열전(孝行列傳)」과 시문(詩文)이 남아 있다.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정만석(鄭晩錫)이 포효비명(褒孝碑銘)을 지었다.

[묘소]

서응윤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반정리에 있다. 묘갈명은 양대연(梁大淵)이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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