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대구지방노동청점거농성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369
한자 大邱地方勞動廳占據籠城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대구로 231[범어동 74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89년 1월 - 대구지방노동청점거농성사건 대하염공, 대하통상, 삼공전자 3개 사업장 노동자 집단 감원 조치, 노조 건설 방해로 사업장 투쟁 시작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9년 2월 3일연표보기 - 대구지방노동청점거농성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89년 2월 11일연표보기 - 대구지방노동청점거농성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대구지방노동청 -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대구로 231[범어동 743]지도보기
종결 장소 대구지방노동청 -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대구로 231[범어동 743]지도보기
성격 노동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진득|정우달|이병수 외 다수

[정의]

1989년 2월 3일부터 2월 12일에 걸쳐 대구 지역에서 위장 폐업과 노동조합 설립 방해, 구사대 폭력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대구지방노동청에서 전개한 농성사건.

[개설]

1989년 1월 14일 대구 소재 삼공전자에서 32명 집단 감원에 노동조합이 태업으로 맞서는 투쟁을 기점으로 대하통상에서는 1월 27일 100여 명의 노동자를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해고하였다. 대하통상과 같은 계열 회사인 대하염공은 어용 노조를 몰아내고 민주 노조 건설을 기치로 1월 30일 철야 농성에 돌입하였다. 이들 3개 사업장은 자체 사업장을 중심으로 요구 관철을 위하여 농성을 진행하였으나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989년 2월 3일 집단 감원을 철회하고 노조 건설을 방해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1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지방노동청을 점거하여 농성에 돌입하였다. 농성이 진행되는 동안 대구 지역 내 노동단체,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지지 대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대구시경찰청은 1989년 2월 9일 삼공전자 노조위원장인 이월녀 등 15명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하였다.

[역사적 배경]

노태우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 민중의 전국적인 조직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1988년 11월 28일 소위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지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군사 독재 정권과 자본의 탄압은 전국의 여러 곳에서 노동자들의 강도 높은 투쟁과 부딪히고 있었다.

[경과]

1989년 2월 8일 오후 2시 경찰 병력, 백골단 500여 명이 대구지방노동청을 포위한 후 최루탄을 대량 투척하며 강제 진압을 시작하였다. 강제 진압 과정에서 이병수, 김신택, 박정애, 이창원이 창문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였다. 끌려 나온 노동자들은 4개 경찰서로 분산 수용되었고, 다음날 경찰은 15명의 노동자를 제외하고 모두 석방하였다.

[결과]

1989년 2월 11일 밤 9시 150여 명의 백골단을 투입하여 농성자 전원을 대구지방노동청 밖으로 끌어냈다. 밤 10시부터 대학생까지 합쳐 40여 명이 대구지방노동청 앞에서 연좌 철야 농성을 시작하였으며 지역 노조위원장 12명은 노상 단식 농성에 들어갔으나 강제 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지방노동청점거농성사건은 대구 지역 민주 노조 운동의 흐름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후 대구경북노동조합연합 결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