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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나타난 대구의 근·현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27
한자 新聞- - 大邱- 近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황현주

[정의]

근현대 신문 기사 속에 등장하는 대구의 모습.

[개설]

대구광역시는 서울, 부산, 대전과 함께 대한민국 5대 도시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도시이다. 그중에서도 근현대기 대표 언론인 신문에 나타난 사건들을 살펴본다.

[근대의 대구]

1. 『독립신문』

대구는 수세기 동안 경상감영의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심지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하였다. 근대의 대구는 경상도 내륙의 중심으로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그중에서도 독립협회의 지회 설치는 이 시기 애국계몽운동의 중요한 사건이 된다.

독립협회는 1896년에 설립되어 『독립신문』 창간, 토론회 개최, 만민공동회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 갔다. 그와 함께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지회를 설치하여 전국적 활동을 이어 가고자 하였다. 지회는 공주, 평양, 대구 순으로 설치되었으며, 지회 설치에 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지회 불허] 대구 사람들이 독립협회 지회를 청하나 폐단이 생길까 염려하여 독립협회에서 듣지 아니하였다더라”[『독립신문』, 1898년 8월 27일].

처음 대구에 지회가 생기려고 했을 때는 반대가 있었다. 지회 설치에 대한 반대는 독립협회 지회가 생기면서 혹여 생길 문제점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대구를 비롯하여 독립협회의 지회는 각 도별로 생기기 시작하였고, 군 단위 지역에도 지회가 생기면서 독립협회의 활동은 점차 활발하여졌다.

“[협회 확장] 독립협회에서 평양지회에 규칙 책 오백 권을 내려 보내고 또 경상도 대구에 지회를 인가하여 실시된다니 공주지회 아울러 외방 독립 지회가 합 세 곳이라더라”[『독립신문』, 1898년 9월 23일].

“[지회 인가] 독립협회에서 어저께 강계군과 북청군과 목포항에 지회 인가를 하여 주었다니 공주 평양 대구 선천 의주 병하여 각 처 지회가 합이 여덟이라더라”[『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더불어 독립협회 대구지회에 보조금을 낸 이들을 『독립신문』에 기재함으로 지회 활동에 대한 내용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독립협회의 지회는 독립협회[서울]의 활동들이 각 지역에서도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 대구지회의 보조금 낸 제씨를 좌에 기재하노라. 중추원 의관 이중하 2원 시위대 부관 최잭익 2원 전 중추원 의관 홍윤조 전 총순 조병선 군부 참위 현덕호 전 주사 김연창 궁내부 시종 정교 궁내부 참리관 이무영 각 1원 전 경무관 보 장규원 2원 전 주사 경환 1원”[『독립신문』, 1898년 11월 3일].

독립협회는 지회 세칙을 세워 규모 있게 운영이 되도록 하였다. 세칙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무 2년 12월 독립협회 총대 위원 각 군 독립 지회 총대 위원 첨좌하 독립협회에서 각 도 각 군 지회에 보내는 세칙과 인가 조례를 좌에 기재하노라.

1은 본 회의 지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청원하는 자는 좌개에 적합한 자로써 인가장을 주는 일

○ 1은 합의한 3인 이상이 충군 애국 목적으로써 각기 지방에 50인 이상을 미리 먼저 단합(團合)한 자로 함

○ 1은 해 지방에 인구가 3,000명 이상에 이른 자로 함

○ 1은 지회 청원인은 해 지방에 사는 자로써 하되 가산을 능히 다스리며 학식이 유여한 자로 함

○ 1은 지회 청원인은 이상 네 조건을 적확히 아는 보증인을 요구하되 본회 회원 중에 실지가 있어 회중에서 믿는 자로써 함

○ 1은 본회 회원 중에 학식이 유여한 자를 뽑아 각 군 지회에 때를 따라 파송하여 시찰하게 하는데 부비는 본회에서 지급함

○ 1은 각 지방 지회에서 법 아닌 일이 있는 경우에는 본회로서 경중을 따라 징벌하되 관계가 극히 중 하면 인가장을 도로 것을 일이라

지회 세칙을 또 좌에 기재하노라.

제 1조는 각 지회는 본회 규칙 범위 안에서만 언론함

제 2조는 대소사를 물론하고 관찰부와 본군에 관계 되는 일은 본회에 보고하여 인가를 얻은 후에 행함

제 3조는 회중 범사를 실상을 들어 요건한 것만 따서 매년 양력 3월 6월 9월 12월에 본회에 보고함

제 4조는 본회에 특별 긴중한 사건이 있는 때에는 각 지회에서 총대 위원 몇 사람씩 올려 보내어 참하되 부비는 해 지회에서 스스로 관리하게 함

제 5조는 원 규칙은 매 권에 엽전 두 돈 오 푼씩 회표는 매 개에 엽전 한 냥씩 본회에 먼저 바치고 영수(領受)함

제 6조는 각 지회 회원이 서울 올라올 때에는 본회 회석에 참례함

제 7조는 본 세칙은 때를 따라 더하기도 하고 덜기도 함”[『독립신문』, 1898년 12월 15일].

2. 『대한매일신보』

국운이 급격히 기울어가면서 일제에 나라를 뺏기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이어져 갔다. 그중에서도 대구의 대표적 항일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애연금 모으기로 시작되었다. 국채보상운동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의 제안으로 실행되었고, 대구 광문사에서 국채보상 취지서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 취지서는 언론으로도 전하여졌으며,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국채 1천 3백만 원은 우리나라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가 못 갚는다면 그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중략]……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 원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은 부호나 지주·자본가, 전문 지식인과 관료 등의 사회 상층의 역할도 크지만 민중의 참여가 확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부녀자와 아동, 걸인, 백정, 마부, 고용자, 기생 등 실로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소유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기생은 국채보상운동에 의연금을 내는 것을 ‘국민의 의무’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다. 국채보상운동의 의연은 부호들의 큰 기부금을 비롯하여 흡연자들의 단연, 술 마시는 사람들의 단주 또는 금주, 가락지나 비녀 등의 패물 기부, 먹을 것을 줄여 모금하는 일상적인 방법도 있었다.

[현대의 대구]

일제강점기 중에도 대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과 같은 여러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해방을 맞게 되었고 조국의 빛을 되찾게 되었다. 해방 이후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 대구에도 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그때마다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다.

1. 10월항쟁에 대한 보도

1946년 대구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10월항쟁이다. 10월항쟁9월총파업으로 시작된다. 대구 9월총파업조선공산당이 1946년 7월 신전술을 발표하면서 벌인 적극적 방식의 대중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의 9월총파업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의 지도로 1946년 9월 23일 오후 3시 무렵 철도기관구 노동조합원 1,000여 명이 파업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대구의 9월총파업이 확대되자 1946년 9월 27일 미군정청 경북도지사인 에드윈 A. 헨과 김의균 민선도지사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에 협상을 요구하며, 도지사실에서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의장 윤장혁과 노동조합 주요 간부 4명과 함께 파업 철회 협상을 벌였다. 1946년 10월 1일 늦은 저녁 총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사수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대구시·경북도위원회는 산하 주요 단체를 대상으로 비상대책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회의 결과 10월 2일 노동자들을 총동원하여 경찰에 대하여 규탄하고, 책임 추궁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10월 항쟁의 내용은 1946년 10월 8일 『조선일보』에 「대구소요사태의 경위서」, 「대구급근접지역의 폭동 진상과 수습방책에 대하야」, 「대구사건의 중대성」 등의 기사로 게재되었다.

2. 향토언론에 연재된 신문연재소설

해방 이후 대구에 향토 언론이 생겨났고, 한국전쟁 이후 대구·경북의 신문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소설들이 연재되었다.

『대구매일신문』에는 8편의 소설이 연재되었는데, 그중 장덕조(張德祚)의 「여자 삼십대」는 지역 작가가 대구를 공간 배경으로 전시 후방의 미망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대구매일신문』에는 전쟁의 참상을 비극적으로 제시하는 반전적 분위기가 드러나는 소설도 연재되었다.

『영남일보』에는 11편의 소설이 연재되었는데,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이어 대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소설이 연재되기도 하였다. 『영남일보』은 단편을 주로 연재하였으며, 그 내용이 다채로운 편이었다.

『천주교회보』는 『가톨릭신문』의 전신으로 반공적 성향이 강한 신문이다. 『천주교회보』에 연재된 소설은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아픔이 반공적으로 변주하면서 글의 흐름을 이어 갔다.

1949년 『대구매일신문』에 연재된 박승극(朴勝極)의 「밥」이나, 백남수의 「열풍」이 토지개혁 문제와 친일파 청산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전쟁 당시의 정치적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대구매일신문』에 연재된 소설은 사상적 낙차와 급변의 정서를 전쟁 전후의 상황과 연관하여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천주교회보』에 연재된 소설은 소재를 반공의식으로 변주하여 전투력을 독려하고자 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영남일보』에 연재된 소설은 현실의 긴장감이 두드러지며 지역과 중앙 작가들에게 연재 기회를 주어 다양한 관점으로 대구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게 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 시기의 대구의 상황을 잘 보여 주는 신문 기사들을 살펴보면 당시 대구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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