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767
한자 大邱 達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1]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배성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261년연표보기 - 대구 달성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469년 - 대구 달성 석축
개축|증축 시기/일시 1596년 - 대구 달성 개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3년 - 대구 달성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4년 - 대구 달성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7년 - 대구 달성 도리이 류조가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41년 - 대구 달성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수습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대구 달성 사적 제62호로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8년 - 대구 달성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현 향토문화관 건립부지 남쪽 절개지 수습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0년 - 대구 달성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현 물새장 조성지 수습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6년 - 대구 달성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추정서문지 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7년 3월 - 대구 달성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비산동 커뮤니센터 건립 부지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7년 4월 - 대구 달성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달성토성 공영주차장 부지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6월 29일 - 대구 달성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대구 달성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1~5]지도보기
성격 성곽
양식 토석혼축
크기(높이,길이,둘레) 1.3㎞[둘레]|4~7m[높이]
면적 127,010㎡
관리자 대구광역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에 있는 삼국시대 성곽.

[개설]

달성은 신라가 대구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중심부에 쌓은 군사 및 공해 시설이다. 처음에는 토성의 형태로 쌓았다가 5세기 이후 석축을 부가하여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으로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15년(261) 2월 달벌성이란 이름으로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1390년(고려 공양왕 2) 개축한 기사가 있으며, 1596년(조선 선조 29)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달성 내에 두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파괴되어 안동도호부로 옮길 때까지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러한 문헌 기록과 달성의 기초조사, 인접한 달성 고분군의 조사 자료를 통하여 보면 3~4세기 축조된 이른 시기의 성곽이 분명하다.

[건립 경위]

『삼국사기』 첨해이사금 15년 2월조에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을 통하여 3세기 중엽 처음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달성은 신라가 대구 지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한 군사적 요충지로 관리를 파견하고, 성내에는 공해 시설을 두어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구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집단의 대규모 묘역인 대구 달성 고분군의 북쪽에 달성이 축성되었다는 점은 이미 대구가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위치]

달성은 대구분지의 중심부로 삼국시대 대구의 최고 지배 집단 묘역인 달성 고분군의 북쪽 말단부에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1~5번지 달성공원 일대에 해당한다. 달성이 만들어진 곳은 달서천(達西川)이 휘감은 해발 37~64m의 나지막한 구릉의 말단부로 자연 지형을 잘 활용하여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다.

[형태]

대구 달성은 여러 개의 낮은 능선과 계곡을 연결하여 조성되었는데, 대구분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릉 말단부의 지형적 특성을 잘 활용하여 축성한 평산성(平山城)이다. 성벽의 규모는 둘레가 약 1.3㎞이고, 내측 높이는 4~7m 내외이며, 사적 지정 면적은 12만 7010㎡이지만, 성벽을 기준으로 한 내부는 10만 5238.5㎡ 정도이다. 현재 공원과 동물원으로 조성하면서 형상이 많이 변경되었으나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서는 돌로 쌓고 둘레 944자[286m]이며, 높이가 4자[1.2m]인데 성안에 우물 세 곳과 두 개의 연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달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사는 이루어진 바 없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간단한 조사가 반복되어 왔다. 달성 내 조사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요배전(遙拜殿) 개축공사 시 거북모양토기가 수습[추정 서문지 동편 잔디밭]되어 대구경찰서에 신고되었다. 1914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와 사와 준이치[沢俊一]가 추정 동문지 절개부 주변 지표 조사[현 정문 북편]를 실시하였다. 1917년 도리이 류조가 추정 동문지 절개부 등 5개 지점에 대한 트렌치 조사를 실시하여 시루편, 고배 대각편, 승석문과 격자문 토기편, 민물 및 바다 패각류, 각종 동물뼈 등을 확인하였다. 1941년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구 국체명징관[현 테니스장 남편] 건립 과정에서 성벽의 내벽이 대량 훼손되면서 남쪽 내벽의 훼손 양상을 파악하는 정도의 수습 조사를 실시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1968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현 향토문화관 건립부지 남쪽 절개지를 수습 조사하여 4기의 문화층과 토석혼축의 성벽 및 기원전 1세기~기원후 4세기 전반 경의 각종 유물 확인하였다. 제Ⅰ기 문화층은 제Ⅱ기 문화층 위에 토석혼축으로 성체가 쌓여졌던 층으로 단면상은 제Ⅱ기 문화층의 동쪽 끝부분 경사진 소토층 위에 막돌을 높게 쌓고 바깥쪽과 안쪽면을 흙으로 포장하듯이 쌓아 올린 구조이다. 조사자는 4세기 전반에 조성된 제Ⅱ기 문화층 위에 쌓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제Ⅱ기 문화층은 3개의 생활문화층으로 추정되는 소토층이 확인되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단절되지 않고 체성 중심부까지 이어져 있다. 체성 중심에서 서편은 잡석이 없는 수평의 소토층이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동편은 바깥으로 경사지게 잡석이 많이 포함된 소토층을 이루며, 4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굽다리접시·기대·짧은목항아리[단경호] 등의 토기편과 철편, 가락바퀴[방추차],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다.

제Ⅲ기 문화층은 3개의 생활문화층으로 구분되는 4세기 점토층으로 하층은 흑색부식토층이고, 나머지 2층은 넓고 길게 확인되는 적색 소토층이다. 적색 소토층은 아래층의 말뚝 분포 범위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이를 기준으로 안팎으로 약간 경사지게 형성되어 있다. 퇴적층이 인위적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내측은 수평 외측은 출입이 힘들도록 단애상의 절벽으로 만들고 외측의 달서천을 자연 해자로 활용한 초축 시기[261년 달벌성 축조]와 관련된 양상으로 추정하였다. 퇴적층에서는 타날문토기편, 짧은목항아리, 소옹, 파수, 시루 등과 인문토기(印文土器)편이 수 점 출토되었는데, 달성 고분군의 목곽묘 단계와 비교하여 기원후 2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제Ⅳ기 문화층은 암반층 바로 위에 형성된 하천 연안의 사질토층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달성을 축조 이전의 구릉에서 생활하였던 사람들의 흔적과 관련된 문화층이다. 체성 정상에서 6.5m 정도 깊이로 평탄지에서 경사지로 이어지는 지점인 4m 구간에 지름 10㎝ 내외의 원목 말뚝 10여가 확인되었다. 문화층에서는 목탄편, 복숭아씨, 짐승뼈, 패각류 그리고 골제화살촉, 흑색무문와질토기, 타날문토기편 등이 출토되는데,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기원후 2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유물들이다.

1970년 대형 동물 방사장을 설치하면서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북편 연못[현 물새장] 가운데 지름 2×2m, 깊이 3.5m 규모의 피트 조사를 실시하였다. 4개의 층이 확인되고 최하층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제1층은 연못 바닥에서 1.2m 깊이의 잡토층으로 일제강점기 오물과 조선 후기 백자편이 확인된다. 제2층은 80~90㎝ 정도 두께의 사질이 포함된 흑색뻘층으로 자연 퇴적층이다. 제3층은 70~80㎝ 정도의 황갈색점토층으로 상면에 넓적한 할석이 깔려 있었다. 제4층은 암반층 상면의 50㎝ 정도 되는 뻘층으로 패각류, 타날문 와질토기, 칠기, 참빗 등이 출토되었는데, 1968년 조사의 제Ⅳ층과 동시기 문화층으로 추정한다.

2016년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추정]서문지에 대한 시굴로 4개소의 피트 조사를 실시하였다. 5세기에 개축한 토성의 외피 토루 또는 기초부로 추정되는 구조물과 1390년 또는 1596년 축석하였다는 기록과 관련된 석축을 확인하였다. 삼국시대[5세기] 토성의 외피 토루 또는 기초부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성토층 내부에서는 석축 또는 토축 붕괴 방지를 위한 적심석[경사식 판상석 쌓기]과 위에 토낭[또는 토괴]을 이용한 다짐성토층이 확인되었다. 경사면 하단부에서는 다짐성토층의 위에 석비레와 점토가 혼합된 층과 자갈층 등이 구축된 양상이 확인되는데, 용도는 토성 경사면 하부를 보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현재 토성의 상면에 조성된 탐방로에서 아래로 1.3m 정도는 근래에 탐방로 유지 보수를 위하여 채우거나 축석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의 아래에서 적색점토와 함께 확인되는 석렬은 1390년(공양왕 2) 또는 1596년(선조 29) 축석하였다는 기록과 관련된 석축의 최하단석으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은 5세기의 통형기대편, 발형기대편, 고배편, 승문타날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2017년 3월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비산동 터뮤니티센터 부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채석장으로 사용된 길이 10m, 너비 5m, 깊이 1~2m 정도의 암광유구(巖壙遺構) 1기와 내부에서 5세기 토기편이 확인되었다. 달성토성 서문 출입로의 남쪽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달성의 서쪽사면 끝자락에 접하여 있고, 달성 고분군의 분포 범위 내에 포함되었다. 조사 결과 성벽 축조 시 사용된 석재들을 굴착하여 채석하고 남은 암광유구 1기가 자연 폐기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전체 중 서벽과 남벽을 확인하였는데, 북벽과 동벽은 밖으로 계속 진행되는 양상이다. 확인 규모는 길이 10m, 폭 5m, 깊이 1~2m로 장축 방향은 달성토성의 성벽 진행 방향과 동일한 남북 방향이다. 유물은 바닥면에서 토도류 12점이 출토되었다. 달성 축조 시 적심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석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채석 후 남은 대형 구덩이는 달성의 외부 방어 시설[湟 또는 垓字]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성 시기는 암광유구 최하층에서 출토된 대호편, 적색연질토기편, 호 구연부편 등으로 보아 5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2017년 4월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달성토성 공영주차장 부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채석장으로 사용된 길이 10m, 너비 5~8m, 깊이 0.3~0.7m 정도의 암광유구 1기와 수백 점의 5세기 토기편이 확인되었다. 달성토성 서문 출입로의 남쪽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달성 서쪽 성벽의 사면 아래쪽에 해당하며, 달성 고분군의 분포 범위 내에 포함된다. 조사 결과 성벽의 내부 적심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채석한 암광유구가 자연 폐기된 상태로 현 표토 아래에 1.2~2m 정도의 깊이에서 확인되었다. 바닥 부분만 남아 있는데, 서쪽과 남쪽 벽은 확인되었지만 북쪽과 동쪽 벽은 범위 밖으로 계속 진행된다. 확인 규모는 길이 10m, 너비 5~8m, 깊이 0.3~0.7m로 장축 방향은 달성토성의 성벽 진행 방향과 동일한 남서~북동 방향이다. 유물은 바닥과 내부토 제거 과정에서 토도류 104점과 말의 두개골 1점이 출토되었다. 달성 축조 시 적심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채석하던 장소로, 채석 후 남은 대형 구덩이는 달성의 외부 방어시설[湟 또는 垓字]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 시기는 암광유구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5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현황]

대구 달성은 삼국시대인 251년 초축된 이후 고려시대인 1390년과 조선시대인 1596년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달성 내에는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군창(軍倉)이 있었고, 1736년(영조 12) 새로이 대구읍성을 쌓을 때까지 보장(堡障)[소규모의 요새] 노릇을 하였다. 달성달성서씨(達城徐氏)의 세거지로 알려져 있고, 1905년(광무 9)부터 신사가 설치되고 공원으로 이용되다가 광복 이후 21년 만인 1966년 신사가 철거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제62호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 삭제]으로 지정되어 보호되었으며, 1965년 공원 조성이 결정 고시된 이래 1969년 정문과 종합문화관이 신축되고, 1970년 동물원을 준공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 달성은 삼국시대 남부지방 초기 성곽의 전형이며, 261년 2월 달벌성이란 명칭으로 축조된 기록이 명확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초기 성곽 발달사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진다. 더불어 발굴 조사를 통하여 초기에는 토성으로 축조된 후 5세기 이후에는 석축을 부가하여 토석혼축성의 형태로 완성한 것이 확인되어 토성에서 석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기록으로 미루어 개보수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방어 용도뿐 아니라 대구 지역을 관리하는 공해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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