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748
한자 大邱 慶尙監營址
영어공식명칭 Daegu Gyeongsang-gamyoengji|Gyeongsang-gamyeong Provincial Office Site, Daegu
이칭/별칭 중앙공원,대구 탑골공원,경상감영공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배성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9년 11월 11일~12월 9일 - 대구 경상감영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분포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2017년 4월 6일연표보기 - 대구 경상감영지 사적 제538호로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7년 9월 13일~10월 16일 - 대구 경상감영지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20년 4월 20일~7월 21일 - 대구 경상감영지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6월 29일 - 대구 경상감영지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성격 관아 터
지정 면적 14,678.7㎡
소유자 대구광역시
관리자 대구광역시 중구청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경상도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아의 터.

[개설]

대구 경상감영지(大邱 慶尙監營址)는 조선의 지방 통치를 담당하던 8도제가 확립된 이후 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찰사가 거처하며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전기에 경상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졌다가 합쳐지기가 되풀이됨에 따라 경상감영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다. 개국 초부터 1407년(태종 7)까지는 감영을 경주부에 두고 경주부윤이 경상감사를 겸하였다가, 1408년(태종 8)에는 상주, 1593년(선조 26)에는 팔거현[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1596년(선조 29)에는 대구부 달성, 1599년(선조 32)에는 안동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1601년(선조 34) 대구부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정착하였다. 이후 갑오개혁으로 8도제가 폐지될 때까지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지이자 감영 소재지였다.

경상감영의 공간 구성은 크게 객사 공간, 감영 공간, 부속 공간으로 구분된다. 객사는 대구부아(大邱府衙) 뒤편에 있다. 감영 공간은 정청인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을 중심으로 좌측에 대구부아, 우측에 군사 시설인 중영(中營)을 두었고, 그 앞쪽에는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진입부에는 중문과 관풍루[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를 세웠으며, 그 좌우에 부속 공간을 배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는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과 살림집인 징청각(澄淸閣)[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만 남아 있다.

대구 경상감영지는 2017년 4월 26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변천]

경상감영은 1601년에 체찰사 이덕형의 노력으로 대구부(大丘府)에 설치된 후부터 세 차례 화재를 입었다. 공해(公廨) 건물들이 재건된 바 있지만 갑오개혁 이전까지 경상도의 감영 소재지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 이후에도 경상북도청 및 주요 관청으로 이용되다가 현재는 경상감영공원 및 사적 대구 경상감영지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1601년 지금의 중구 포정동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1670년(현종 11) 제1차 화재가 일어났다. 영리청 화재로 문서 및 기록물이 전소되었다. 1730년(영조 6) 제2차 화재가 일어났다. 관찰사 조현명 부임 기간 중 화재가 발생하여 중건하였다. 1736년(영조 12) 경상감사 민응수의 건의로 대구읍성을 축조하였다.

1806년(순조 6) 제3차 화재가 일어났다. 징청각, 선화당, 여수각, 내아, 연초당, 좌우 익랑, 공고 등 공해 건물 184칸이 전소하였다. 1807년(순조 7) 관찰사 윤광안이 공해 건물을 재건[현재의 선화당, 징청각 건립]하였다. 1870년(고종 7) 대구읍성 대중수 및 공해 각처 256칸을 보수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으로 대구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고종 33) 경상북도관찰부로 전환되었다.

1897년(고종 34) 경상감영의 중영이던 제승당을 최초로 대구경찰청사로 사용하였다. 1906년(고종 43) 경상감영 외영리청터에 대구우체국을 신축하였다. 선화당대구 이사청을 설치하였다. 1907년(고종 43) 대구읍성이 철거[1906~1907년]되었다. 1908년(순종 2) 객사가 철거되었고, 대구경찰청이 현 중부경찰서로 신축 이전하였다. 1909년 대구 이사청이 이전하였고, 대구읍성십자도로가 개설되었다.

1910년 경상감영 선화당 및 내영리청에 헌병대 본부 및 헌병분대, 분견소가 설치되었다. 1918년 대구부아 부지[현 대구종로초등학교]에 대구본정공립심상소학교가 개교하였다. 1920년 관풍루달성공원으로 이축되었고, 선화당은 경상북도 산림과, 징청각은 농무과로 이용되었다.

1966년 경상북도청 2016년 2월까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었던 구 도청 부지로 이전하였다. 1970년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이 개원하였다. 1972년 12월 29일 선화당, 징청각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2년 3월 4일 선화당, 징청각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7년 중앙공원에서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7년 4월 26일 대구 경상감영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위치]

대구 경상감영지는 대구광역시의 중심부인 중구 포정동 일원에 있으며, 현재 경상감영공원대구 경상감영지로 관리되고 있다. 경상감영지 내에는 공해 건물인 선화당징청각이 남아 있으며, 분수와 화장실·잔디 광장·벤치 등이 설치되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정비되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9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선화당징청각 유구 분포 조사를 하였다. 2009년 11월 11일부터 2009년 12월 9일까지 경상감영의 정청인 선화당과 관찰사의 처소인 징청각의 복원 정비 방안 마련을 위하여 실시된 조사이다. 조사를 통하여 선화당징청각은 여러 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은 바 있고, 현재 건물은 1807년(순조 7) 건립된 뒤 1874년(고종 11)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그 뒤 경북도청 등 관공서로 이용되면서 변형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선화당에는 건물 내부에 4개소, 기단부에 3개소의 트렌치를 설치하였다. 건물 내부에서는 현 바닥층에서 10㎝ 정도 아래에서 추정 고막이를 비롯해 일부 칸에서 구들이 확인되었고, 기단부에서는 1개소의 트렌치에서 기단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이 확인되었다. 징청각에는 건물 내부에 10개소, 기단부 2개소의 트렌치를 설치했다. 건물 내부에서는 후대의 바닥면과 구들 고래, 고막이 등이 확인되었고, 기단부에서는 판형으로 정교히 마감한 장대석의 기단석과 기단석 상면 안쪽에 삼각형의 전 1매가 마감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2017년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구 대구경북지방병무청 부지를 시굴 조사하였다. 2017년 9월 13일부터 2017년 10월 16일까지 경상감영지 남쪽 도로 건너편 부지 일대에 대하여 실시한 시굴 조사이다. 조사 결과, 표토 아래 1.0~1.7m 정도의 갈색 사질 점토층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3동, 담장지 1개소, 적심 1기, 석열 21기, 추정 초석 1기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조신시대 자기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조사단에서는 1907년 제작된 감영 공해도에 기록된 도훈도청, 군뢰청, 관풍루 등과 감영 부속과 관련된 건물지의 하부 유구로 판단하였다.

2020년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구 대구경북지방병무청 부지 정밀 발굴 조사를 하였다. 시굴 조사를 통하여 제기된 경상감영 부속 건물지 등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목적으로 2020년 4월 20일부터 2020년 7월 21일까지 실시되었다. 구 대구경북지방병무청 부지는 사적 제538호 대구 경상감영지의 사적 범위에 벗어나지만 1907년 경상감영 공해도에는 감영 주 진입로를 중심으로 중삼문과 관풍루, 부속 건물들이 표기되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헌병대와 대구경북지방병무청이 들어서 있었던 곳이었다. 조사를 통하여 감영의 주 진입로와 정문인 관풍루지[추정], 중문인 중삼문지의 적심과 암거 배수로 등의 기초 시설과 함께 중삼문에서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步道)의 끝 부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진입로의 동편에서는 감영 부속건물인 도훈도청지 및 군뢰청지[추정]와 관련된 건물지와 화장실, 석렬 등의 기초시설이 일부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 주거지 1기와 고려시대 주거지 1기, 조선시대 감영 부속 시설의 폐기 과정에서 형성된 각종 수혈 유구·구상 유구·할석군·적심·주혈·폐기장 등이 조사되었다. 유물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자기류, 토기류, 기와류 등 320여 점이 출토되었다.

[현황]

경상감영은 1601년에 대구부에 설치된 후부터 모두 세 차례 화재를 입은 바 있다. 첫 번째는 1670년 3월 22일 감영 소속의 영리청에서 발화되어 문서 및 기록물이 소실되었다. 두 번째는 1730년(영조 6) 7월에서 1732년(영조 8) 10월 사이로 영사가 전소하여 모두 신축하였다. 세 번째는 1806년 12월 3일 책실에서 발화하여 징청각, 선화당, 여수각, 내아, 연초당, 좌우 익랑, 공고 등을 전소하였다. 그 후 1807년 관찰사 윤광안이 선화당징청각 등을 중수하였는데, 선화당징청각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후 경상감영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경상도의 주요 관청들로 사용되다가 1966년에 경상북도 청사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으로 이전한 후 1970년대에 중앙공원이 조성되었다. 1997년에는 중앙공원에서 경상감영공원으로 개칭되었으며, 2017년 4월 26일 공원 일대를 ‘사적 대구 경상감영지’로 지정하였다.

감영과 관련된 주요 건물로는 1807년 중수된 관찰사의 집무실이던 선화당과 살림집이던 징청각이 남아있다. 그리고 1917~1920년 사이에 달성공원으로 옯겨진 관풍루[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는 경상감영의 정문이다. 주요 유물로는 경상감영 선화당의 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측소로 옮겼다가 지금 기상청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가 있다. 그 외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총 27기의 선정비와 하마비가 경상감영공원 정문 왼쪽에 모여 있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에는 경기감영[한양, 수원, 광주, 영평], 강원감영[원주], 경상감영[대구], 충청감영[공주], 전라감영[전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1601년에 대구에 설치된 경상감영은 원주 강원감영과 더불어 조선시대 감영의 구조를 알 수 있는 건물들이 잘 남아 있다. 특히 경상감영의 경우에는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징청각이 원래 위치에 잘 보존되어 있고, 각종 문헌 자료·고지도·엽서·사진·공해도·지적 원도 등의 고증 자료도 풍부하다. 이와 더불어 대구광역시에서는 발굴 조사를 통하여 관풍루, 중문지, 감영 부속 건물 등을 찾아내 원형을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대구 경상감영지임진왜란 이후 8도 감영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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