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31
한자 茂英堂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무영당 서점으로 개점
설립 시기/일시 1937년 - 무영당 백화점 건립
최초 설립지 무영당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8[서문로1가 58]지도보기
성격 백화점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건립된 백화점.

[개설]

개성상인 출신 이근무(李根茂)가 1937년 대구부 본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에 건립한 무영당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1932년 세운 이비시야백화점, 1934년 세운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과 함께 대구 3대 백화점 가운데 하나였다. 무영당은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에 맞서 대구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건립된 백화점이다. 무영당백화점 2층에 마련한 전시장에서는 전시회나 음악회 등이 개최되어 시인 이상화와 화가 이인성, 동요 시인 윤복진 등 지역의 신지식인과 예술인들이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청년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었다.

[변천]

무영당은 처음 개업할 당시에는 서점이었다. 개업 당시에는 서점과 양품부(洋品部)밖에 없었지만, 1936년에는 도서, 잡지부, 문방구부, 운동구부, 액연회구부(額椽繪具部), 양품잡화부(洋品雜貨部), 악기부 등 취급 품목과 규모가 확대되었다.

서점 무영당이 크게 번창하자 본래 영업하던 자리에 5층 건물을 신축하여 1937년 9월 15일 대구 최초의 민족자본 백화점인 무영당이 건립되었다. 무영당은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식 빌딩 개념을 도입하여 대형화한 5층 규모의 흰색 타일로 마감한 건물이다.

백화점으로 확대된 무영당에는 여행구부, 양가구부(洋家具部), 식료품부, 완구부, 도도와기(陶陶瓷器), 식품부, 사진부 등이 추가되어 전국 단위 백화점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전시실·식당·휴게실·전망대 등의 설비를 완비하여 대구부 원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의 미나카이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일본인 상권과 경쟁하였다. 무영당 개업 당시 하루 이용객은 평균 5,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무영당을 세운 이근무는 일제강점기 대구의 일본인 상권과 경쟁하면서 민족자본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무영당은 1930년 동아부인상회 지점(東亞婦人商會支店), 안창양품점(安昌洋品店), 대구양말소(大邱洋襪所), 서부양품점(西部洋品店) 등 조선인 상점들과 연합하여 대구잡화상 동우회(大邱雜貨商同友會)를 결성하였다. 대구잡화상 동우회는 특수 상품의 공동 구입, 제조 본포(本鋪)[본점]와 직접 거래하기, 제품 가격의 2/3를 대구잡화상 동우회에 적립한 후 소매 단가 낮추기, 공동 선전과 공동 발매 등을 통하여 일본인 상점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무영당 2층에 꾸며진 전시장에서는 전시회와 음악회 등이 자주 열려 무영당은 대구를 대표하는 항일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화, 대구가 낳은 화가 이인성 등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현황]

미나카이백화점은 1984년 철거되었고, 이비시야백화점은 여러 차례 수리로 원형을 잃어버렸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무영당은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백화점 건물의 건축적 가치와 역사·문화적 가치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근대 문화유산이다. 대구광역시는 2020년 무영당과 6·25 피란 시절 당대 최고 예술인들이 교류하였던 대지바[중구 향촌동 14-5 외 2]를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근대 건축물로 지정하고, 무영당과 대지바 건물을 철거 직전 매입하여 역사적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시민공간으로 되돌려 주는 프로젝트 개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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