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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원행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413
한자 崔興遠 行狀
영어공식명칭 Choi Heung-won Haengjang (Behavior)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14년 - 「최흥원행장」이광정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89년 - 「최흥원행장」이광정 사망
배경 지역 「최흥원행장」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지도보기
성격 전장류|행장
작가 이광정

[정의]

조선 후기 유학자인 이광정이 지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살았던 백불암 최흥원의 행장.

[개설]

이광정(李光靖)[1714~1789]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휴문(休文), 호는 소산(小山)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동생으로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 수학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부친이 의병을 일으키자, 15세 나이로 종군하였다. 이황의 학문을 흠모하여 형 이상정의 지도를 받으며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경술(經術)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 등에 제수되었다. 당시 학자에 따라 구구하던 예설(禮說)을 정리하여 안동 지방의 표준 예설이 되게 하였다. 18세기 후반 퇴계학맥을 계승한 유학자로 형 이상정과 함께 북송 때 도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유되었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를 세웠다. 「부인동규」가 설치되어도 부인동 일대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1753년(영조 29)에는 선공고(先公庫)[토지세 대납]·휼빈고(卹貧庫)[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 지급]를 설치해 부인동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선공고와 휼빈고가 잘 운영되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다. 최흥원은 경모궁 수봉관, 장악원 주부, 공조 좌랑, 익위사 익찬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죽은 뒤 최흥원은 1789년 효행으로 정려문[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세워졌고, 1790년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

[구성]

「최흥원행장」은 전체적인 구성은 최흥원의 자호(字號)·세계(世系)·평소의 언행·가계(家系)·행장 저작동기로 이루어져있다.

[내용]

이광정이 지은 최흥원의 「행장(行狀)」 서두에 효성으로 이름난 최흥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최흥원의 세계(世系)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최흥원의 아름다운 품성과 효성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연대별로 나열하고, 최흥원의 수신제가하는 평소 삶의 태도를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최흥원의 가계(家系)를 소개하고, 최흥원 평생의 공(功)과 덕(德)을 칭송하며 최흥원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행장」 일부 내용이다.

공[최흥원]의 효우(孝友)와 목인(睦婣)은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요, 즐겁게 허물을 듣고 용기 있게 선을 옮김은 맑음에서 받은 기운이었다. 경박하거나 화려함을 싫어하고 본성을 돈독히 하였으며, 명리를 밖으로 하고 담박함을 즐겼다. 인의(仁義)를 숭상한즉 단표(簞瓢)의 고충을 알지 못했고 바른길로 가게 된 즉 옆 사람의 시비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특징]

「최흥원행장」최흥원과 관련한 다양한 일화 제시해 행장 내용의 사실성을 부각시켰다.

[의의와 평가]

「최흥원행장」은 행장의 선후 맥락이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최흥원의 일생이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또한 옻골마을 경주최씨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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