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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631
한자 李仲燮
영어공식명칭 Lee Jungseop
이칭/별칭 대향,소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6년 - 이중섭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이중섭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 입선, 협회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이중섭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 4점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이중섭 제1회 조선신미술가협회 결성. 창립전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이중섭 제5회 자유미술가협회전 2점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이중섭 제6회 자유미술가협회전 5점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이중섭 제7회 자유미술가협회 태양상 수상
몰년 시기/일시 1956년 9월 6일연표보기 - 이중섭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 이중섭 은관문화훈장 수여
출생지 이중섭 출생지 -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
학교|수학지 이중섭 학교 - 평안북도 정주군
학교|수학지 이중섭 학교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이중섭 학교 - 일본 도쿄
활동지 이중섭 미술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로 27-3[서귀동 532-1]
활동지 이중섭 거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묘소 이중섭 묘소 - 경기도 구리시
성격 화가
성별
대표 경력 은관문화훈장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동촌유원지의 풍경을 그린 한국 근대 미술의 대표 화가.

[개설]

한국 근대 미술의 선구자인 대향(大鄕) 이중섭[1916~1956]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질곡의 한국사를 거쳤다. 계속되는 민족의 역경과 시련 속에 이중섭에게도 참담한 생활고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빠졌고 아내는 결핵에 걸렸다. 1952년 여름, 이중섭의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고 이중섭은 한국에 홀로 남아 그림을 그렸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편지와 그림을 보내며 가족 간 유대를 이어갔다. 아내에게 보낸 그림 중 하나가 「소나기 내리는 동촌 유원지」이다. 향토적인 색채로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 「소나기 내리는 동촌 유원지」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중섭의 생동감 넘치는 선은 이중섭의 또 다른 작품 「흰 소」, 「황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중섭은 민족의 상징인 소를 그려 황폐한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자 자신을 표현했다. 이중섭의 유화 작품에 표현된 특유의 선은 서예의 필법을 연상시키고 향토적인 색채에서는 민족정신이 드러난다. 이처럼 이중섭의 작품은 선 표현과 강렬함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한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은지화가 있다. 은지화는 담뱃갑 속 은종이에 새기거나 긁어 표현한 새로운 기법이다. 은종이에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드로잉 작품으로 도자공예의 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전통을 존중했던 작가의 의식이 작품에 그대로 담겨있으며 민족의 역사와 정신, 해학미가 드러난다.

[활동 사항]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의 부유한 가문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애국운동의 거점이 된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미국과 유럽 등지를 돌면서 본격적으로 유화를 공부한 임용련과 일본, 프랑스에서 유화를 공부한 백남순을 만나 그림을 배웠다.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는 서구 모방보다 동양적이며 민족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자기다운 유화의 세계를 추구했다. 이중섭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거침없이 대상을 그리는 야수파적인 기법을 익히며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다니던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현 무사시노미술대학]를 그만두고 분카가쿠잉[文化學院]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화가 활동을 시작했다. 2년 뒤인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가 실시한 두 번째 공모전에서 입선하였고 협회상을 수상하여 작품을 알리게 되었다. 또한 식민지 시대 말기에 유일하게 타올랐던 민족미술단체인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창설하여 전시에 참여했다. 자유롭고 강렬한 선묘력이 돋보이는 그의 그림은 일본 화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호평이 계속되었다. 분카가쿠잉 재학 당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한국명 이남덕]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져 1945년 원산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도 잠시 첫 아이가 병을 앓다가 죽었다.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은 후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1947년 해방기념전람회에 출품했고 비평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어머니를 남겨두고 월남하여 제주도, 부산 등지에서 피란 생활을 하였다. 1952년에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뒤 이중섭은 통영, 서울,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지냈다. 가족과 헤어진 후, 아내와 아이들에게 편지와 그림을 보내며 그리움을 달랬다. 아내에게 보낸 그림 중 하나가 「소나기 내리는 동촌 유원지」로,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유원지를 그린 그림이다. 「소나기 내리는 동촌 유원지」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향토적인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선을 사용하여 유쾌하게 표현했다.

가족과의 생이별의 아픔은 이중섭 필생의 걸작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등이 모두 이때 탄생했다. 특히 소는 가장 오랫동안 즐겨 그린 소재였다. 소는 황폐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자 시련을 견디는 이중섭 자신이기도 했다. 그는 소재뿐 아니라 기법에도 많은 탐구를 하여 은지화라는 새로운 작품을 창안했다. 은지화는 담뱃값 속 은종이에 날카로운 못이나 철필로 그린 그림으로 이중섭의 독창적인 기법이다. 이 기법은 은종이에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드로잉 작품으로 도자공예의 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은 미술 재료의 새로운 확장이라는 의미를 인정받아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던 뉴욕에서 작품을 인정받은 것이다.

천재적 예술성을 바탕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으나 후배의 배신과 사기로 인해 생활이 궁핍해졌다.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받다가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죽은 지 사흘째가 되어서야 그의 사망 사실을 알게 된 지인들이 그의 장례를 치렀고 그의 유골은 화장되어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안치되었다. 비극적인 죽음 후 1972년, 현대화랑에서 15주기 유작전이 열리며 이중섭의 예술성은 다시 조명되었다. 이후 1980년 건국 3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저술 및 작품]

이중섭의 주요 작품에는 「소나기 내리는 동촌 유원지」(연도미상), 「서귀포의 환상」(1951),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1953), 「소」(1953), 「부부」(1953년경), 「황소」(1953~1954년경), 「길 떠나는 가족」(1954), 「도원」(1954), 「달과 까마귀」(1954), 「투계」(1954년경), 「흰 소」(1954년경), 「누운 소」(1954년경), 「구상네 가족」(1955) 등이 있다.

[묘소]

이중섭은 1956년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1957년 이중섭을 따르던 조각가 차근호가 이중섭의 그림에 나오는 두 아들의 모습을 새겨 묘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이중섭은 1938년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지유텐] 입선 및 협회상을, 1943년 제7회 자유미술가협회[지유텐] 태양상을 수상하고, 1972년 15주기 추모전[현대화랑, 서울특별시]을 열었으며, 197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86년 30주기 추모전[호암갤러리, 서울특별시]을 개최했으며, 2002년 이중섭미술관이 제주도에 개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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