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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64
한자 張恩重
영어공식명칭 Chang Eunjung
이칭/별칭 장혁주(張赫宙),노구치 미노루(野口捻),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시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 10월 13일연표보기 - 장은중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장은중 경주계림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장은중 경주계림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6년 - 장은중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장은중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安德)면립학교 수석교원
활동 시기/일시 1932년 4월 - 장은중 단편소설 「아귀도」로 일본 문단에 등단
활동 시기/일시 1939년 2월 - 장은중 대륙개척문예간화회 발족에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42년 5월 19일 - 장은중 조선총독부 척무과 촉탁으로 만주개척민 문화시찰에 파견됨
활동 시기/일시 1943년 4월 - 장은중 육군특별지원자훈련소 체험 입소
활동 시기/일시 1952년 10월 - 장은중 일본 귀화
몰년 시기/일시 1998년 2월연표보기 - 장은중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경주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활동지 일본 - 일본
성격 작가
성별 남성
본관 인동(仁同)
대표 경력 희도소학교 교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 소설가.

[개설]

장은중(張恩重)[1905~1998]은 1905년 10월 1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장혁주(張赫宙)이며 일본식 이름은 노구치 미노루[野口捻],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913년 경주공립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장은중은 1932년 일본어 소설 「아귀도」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은 작품을 썼지만 1939년 무렵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길을 걸었다.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선전하는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해방 후 일본에 귀화한 후 일본인 작가로 살았다.

[활동 사항]

장은중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졸업 후 1926년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安德)면립학교 수석교원으로 일하였다. 1932년 일본어로 쓴 소설 「아귀도」가 일본 『개조(改造)』지 현상공모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에 「무지개」를 연재하는 등 한국어로도 창작 활동을 하였으나 1940년 「여인초상」을 끝으로 일본어로만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6년 6월부터 활동 근거지를 일본 도쿄로 옮겼다. 1939년 일본 척무성 산하의 국책 문학단체인 대륙개척문예간화회(大陸開拓文藝懇話會) 발족에 참가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만주를 다녀와 만주 개척과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선동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2년 5월 19일에는 조선총독부 척무과 촉탁으로 만주개척민 문화시찰에 파견되었다.

장은중은 1943년 조선인 징병제가 공포되자 조선육군특별지원병훈련소에 3일간 체험 입소한 후 『경성일보』에 「입소일기」를 발표하였다. 조선인 청년이 훈련을 통하여 훌륭한 일본인 군인이 되어 감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44년 3월 25일 장은중은 일본문학보국회 조선황도연구위원회 주도로 큐슈 탄갱 시찰 및 조선인 노동자 격려 방문에 참가하였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벌이는 동안, 장은중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하여 일제의 전쟁을 선전하고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선동하였다.

장은중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장은중의 친일 행적으로 인하여 동포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일본 귀화를 선택하였다.

장은중은 1998년 2월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장은중은 일본 문예잡지 『대지에 서다』[『大地に立つ』, 1930년 10월 호]에 일본어 단편소설 「백양목(白楊木)」을 게재하였다. 실질적인 등단작으로 알려진 「백양목」은 조선인 지주의 횡포와 소작인의 비애를 그렸다. 1932년 발표한 「아귀도」는 조선인 최초로 일본 문단에 등단한 작품이다. 일제의 착취에 시달리는 조선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이며,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아내었다.

1934년 6월 첫 일본어 소설집 『권이라는 사나이』[『権という男』, 개조사(改造社)]를 일본에서 출판하였으며, 조선어 장편소설 「삼곡선(三曲線)」을 『동아일보』에 연재[1933. 9.~1935. 3.]하였다. 일본어 소설집 『인왕동시대(仁王洞時代)』[하출서방(河出書房), 1935], 조선어 산문 「문단(文壇) 페스트균(菌)」[『삼천리』, 1935. 10.] 등과 함께 1937년에는 신협극단(新協劇團)의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의 의뢰로 희곡 『춘향전』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장편소설 『가등청정(加藤淸正)』[개조사(改造社), 1939], 『치인정사(痴人淨士)』[적총서방(赤塚書房), 1939]를, 1941년에는 『조선고전이야기 심청전·춘향전[朝鮮古典物語沈淸傳春香傳]』[적총서방, 1941]을 발표하였다.

장은중은 1939년부터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문예』, 1939년 2월]과 「황도조선의 완성」[『중앙공론』 1942년 10월 호]에서는 식민 통치를 긍정하였다. 여러 차례 만주 시찰을 다녀온 후 소설 「밀수업자(密輸業者)」[『개조』, 1940년 5월 호]와 작품집 『애증의 기록(愛憎の記錄)』[하출서방(河出書房), 1940], 장편소설 「행복한 백성(幸福の民)」[『개척(開拓)』 1942년 5~8월 호]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투먼강[圖們江]의 ‘아편흡연소’ 견학 체험은 「어느 독농가의 술회(ある篤農家の述懐)」[『녹기』, 1943년 1월 호]로 형상화되었다.

장은중의 1943년 장편소설 『개간(開墾)』은 ‘만보산 부락 건설기’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1925년 만보산 개척에서 만주국 건국까지를 다루었다. 『매일신문』에 연재한 「이와모토(岩本) 지원병」[1943. 8. 24.~1943. 9. 9.]은 조선인 청년이 훌륭한 지원병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새로운 출발」[『국민총력』 1943. 6. 15~1943. 9. 15.], 「꿈」[『홋카이도데이다이신문[北海島帝大新聞]』 1943. 3. 23.] 등에서는 조선인 차별 해소의 방안으로 징병제를 거론하며 학병을 권유하였다.

장은중은 해방 이후 『고아들』[만리각(萬里閣), 1946], 『젊은 여자』[하출서방(河出書房), 1948] 등 전쟁의 고통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비원의 꽃』[1950. 3.]은 영친왕의 회고를 토대로 한 작품인데, 작가 자신의 친일에 대한 변명을 시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장은중은 1952년 일본 귀화 후 『음지의 아이』[1956], 『아름다운 저항』[1957], 『검은 지대』[1958], 『암병동』[1959], 『호상의 불사조』[1962] 등 일본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삶을 그려 낸 작품을 썼다.

장은중은 단행본 약 50권, 단편과 희곡 약 80편, 기타 평론과 수필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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