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63
한자 都慶兪
영어공식명칭 Do Gyeongyu
이칭/별칭 내보(來甫),낙음(洛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6년연표보기 - 도경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도경유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27년 5월 - 도경유 금오랑에 제수되어 세자 호종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도경유 은율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도경유 쌍령전투 참전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도경유 유배
몰년 시기/일시 1637년연표보기 - 도경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85년 - 도경유 병암서원에 배향
출생지 도촌리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은율 - 북한 황해도 은율군
묘소|단소 도경유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산181-1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병암서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새방로 21[용산동 521]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성주(星州)
대표 관직 은율현감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문관.

[가계]

도경유(都慶兪)[1596~1637]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자는 내보(來甫), 호는 낙음(洛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도순경(都舜卿)이고, 할아버지는 도흠조(都欽祖)이다. 아버지는 초계군수를 지낸 도원량(都元亮)이고, 어머니는 곽진(郭趁)의 딸 현풍곽씨(玄風郭氏)이다. 부인은 고성후(高成厚)의 딸 제주고씨(濟州高氏)이며, 형은 도응유(都應兪)·도언유(都彦兪)이다.

[활동 사항]

도경유는 1596년(선조 29) 대구 도촌리(都村里)[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서 태어났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 5월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어 세자를 남원으로 호종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28년에는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진하여 황해도 은율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장선도차사원(裝船都差使員)으로 발탁되어 전선(戰船)을 감독하였고, 원접사(遠接使) 김신국(金藎國)[1572~1657]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황주(黃州)에서 명나라 사신단을 맞이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종사관으로 합류하여 머뭇거리는 군대를 독려하기 위하여 우영군관(右營軍官) 박충겸(朴忠謙)의 목을 베며 행군을 이끌었다. 1637년 이천(利川)에 도착하여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의배(李義培)의 부대와 합류하여 쌍령(雙嶺)에서 항전하였다. 1637년 패전한 뒤 유배를 가던 중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도경유의 저술로는 『낙음문집(洛陰文集)』 6권 2책이 있다. 권두에는 정종로(鄭宗魯)의 서문과 권말에는 만각재(晚覺齋) 이동급(李東汲)[1738~1811]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도경유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산181-1에 있다.

[상훈과 추모]

도경유는 사망한 뒤 승지로 증직되었고, 달서구 새방로 21[용산동 521]에 있는 병암서원(屛岩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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