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간 지속해 온 문중연합서당: 이락서당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51
한자 200年間 持續- 門中聯合書堂 伊洛書堂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일주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에 조선시대의 학자인 한강 정구낙재 서사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강학소.

[개설]

이락서당(伊洛書堂)은 조선시대 정조 때 대구, 달성, 칠곡 등 인근 9문중의 선현들이 금호강(琴湖江)낙동강(洛東江)의 합수지인 강창(江倉)을 택하여 삼가헌(三可軒) 박성수(朴聖洙)가 1765년(영조 6) 9월에 착공하여 1766년 봄에 준공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 등을 추모하고 도덕심의 함양과 교육을 하던 서당이다.

금호강은 대구광역시 동구, 북구, 달성군 지역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하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조선시대에 강은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학문이 전달되는 통로이기도 하여 중요시되었다. 금호강낙동강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구 지역의 학문은 낙동강으로 연결되는 경상남북도의 학문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었다. 이락서당은 바로 낙동강금호강이 합류하는 근처의 단애 절벽에 있다.

이락서당금호강을 바라볼 수 있는 ‘파산(巴山)’이라는 나지막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파산은 금호강 줄기가 정구가 만년에 강학하던 사양정사(泗陽精舍) 앞을 흘러 내려오고, 다시 조금 내려와 서사원이 강학하던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지나 파산 자락의 절벽 옆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는 곳이다. 금호강은 파산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예전에 부강정(浮江亭)이 있던 곳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하게 된다.

한강 정구낙재 서사원의 가르침을 받은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다. 이락서당 건립에 참여한 선비는 30명이라고 한다. 문중으로는 모두 아홉 문중인데, 성주도씨 15명, 광주이씨(光州李氏) 1명, 함안조씨 2명, 밀양박씨 1명, 전의이씨 3명, 일직손씨 1명, 순천박씨 2명, 달성서씨 2명, 광주이씨(廣州李氏) 3명이며, 통칭하여 9문 11향 30군자라 한다.

‘이락(伊洛)’이라는 이름은 겉으로는 강을 지칭하면서 내면으로는 당시에 추구하던 학문을 지칭한다. ‘이락’을 강 이름으로 보면 이천정사 부근을 흐르는 이강(伊江)과 낙동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동급(李東汲)이 쓴 「이락서당기(伊洛書堂記)」를 보면 “이름하기를 이락서당이라 한 것은 곧 이강과 낙수(洛水)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名之曰 伊洛書堂 乃伊江洛水交會之地也].”라고 하였다. ‘이강’은 이락서당 부근을 흐르는 금호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락서당 부근을 흐르는 금호강낙동강을 합쳐서 ‘금낙(琴洛)’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이락’이라는 한 것은 당시에 선비들이 지향하던 학문과 연관이 있다.

주자(朱子)는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에서 이천(伊川)과 낙수(洛水)가 흐르는 낙양(洛陽)에서 강학하였던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의 도통(道通)을 밝히고, 송대 성리학의 연원과 전승을 서술하였다. 그 후 ‘이락(伊洛)’은 성리학을 간접적으로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락서당’이라는 이름은 한강 정구낙재 서사원이 강학한 학문이 성리학이며, 이락서당을 건립한 선비들이 추구하는 학문이 성리학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락서당과 관련된 한시]

이락서당 관련 시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금서헌(錦西軒) 박광보(朴光輔)[1761~1839]가 지은 「이락16경(伊洛十六景)」이다. 박광보의 「이락16경」은 이락서당 주변의 풍경을 평사낙안(平沙落雁), 원포귀범(遠浦歸帆), 금성석봉(金城夕烽), 호촌조연(湖村朝烟), 금호야우(琴湖夜雨), 슬악청람(瑟嶽晴嵐), 용연완어(龍淵玩魚), 마탄관창(馬灘觀漲), 강천모설(江天暮雪), 대야황운(大野黃雲), 장교목적(長郊牧笛), 구포어등(鷗浦漁燈), 파산추월(巴山秋月), 주암춘화(鑄巖春花), 죽령낙조(竹嶺落照), 고도행인(古渡行人) 등의 16경으로 나누어 읊은 시이다. 박광보는 문장이 뛰어나 여러 차례 천거된 인물이다.

그 후 이락서당에 대하여 시를 짓는 사람들은 「이락16경」을 차운하여 짓는 경우가 많았다. 2002년에 이락서당에서는 이락16경을 읊은 17명의 시를 수합하여 『이락서당십육경(伊洛書堂十六景)』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 외에 이락서당에 대한 시로는 서호(西湖) 도석규(都錫珪)[1773~1837]가 금호강 하류인 서재리 부근을 「서호병10곡(西湖屛十曲)」으로 읊으면서 제2곡에서 이락서당을 노래하였다. 도석규는 37세에 성균진사(成均進士)를 하였으며, 『가례편고(家禮便考)』, 『해동국원록(海東群源錄)』 등을 편찬한 인물이다.

그리고 경도재(景陶齋) 우성규(禹成圭)[1830~1905]도 금호강 하류 지역에 운림구곡(雲林九曲)을 설정하고, 제6곡 연재(淵齋)에서 이락서당을 노래하였다. 우성규는 달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 올라가 명류(名流)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박광보의 「이락16경」에서 제5경 금호야우(琴湖夜雨)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봄비가 내려서 갈 수 없는데[春山滯我有情雨]

경치가 희미하다고 어찌 싫어하리오[景物稀微何足嫌]

밤새도록 뜰 안에 나무 꽃이 다투어 피는데[一夜催花繞砌樹]

관솔불은 눈물 흘리고 강가의 하늘 저무네[松燈穿淚江雲暮]

「이락16경」을 차운한 시 이성용(李誠容)의 「파산추월(巴山秋月)」은 다음과 같다.

강가에는 높은 누대 산 위에는 달[江上高樓山上月]

작은 구름 둘러 있는 푸른 하늘 넓구나[纖雲遙捲碧空闊]

밤이 점점 깊어지자 달빛 더욱 밝아져[夜深轉益吐光輝]

얼음처럼 흰 달이 너무나도 밝구나[桂魄氷輪明欲裂]

「이락16경」을 차운한 시 이수용(李秀容)의 「원포귀범(遠浦歸帆)」은 다음과 같다.

푸른 강에 해 저무니 돛단배 모여들고[滄江日暮簇歸帆]

만 리에 바람 없으니 물결이 잔잔하구나[萬里無風浪起纖]

뱃노래 한 곡조에 산과 물 푸르니[一曲棹歌山水碧]

누각의 경관이 훨씬 아름답게 보이네[也知樓景十分添]

[건물 형태]

『이락서당지』[2015]에 의하면, 이락서당한강 정구낙재 서사원을 추모하고 학풍을 이어 가기 위하여 만든 서당인데, 1798년(정조 22) 9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1799년 봄에 완공하였다. 서당은 급한 경사지에 터를 잡은 관계로 서당을 둘러싸는 담장은 층단(層段)을 이루고 있으며 서당 우측으로 난 일각문(一角門)을 통하여 서당으로 들게 된다. 서당은 층단으로 기단을 쌓고 방 하부에 높게 축대를 조성한 후 건물을 세워 정면은 다락집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이락서당의 규모는 정당(正堂) 4칸, 협실(夾室) 4칸이었다. 동쪽 협실은 ‘모한당(慕寒堂)’이라 하였는데 한강을 존모한다는 뜻이고, 서쪽 협실을 ‘경락재(景樂齋)’라 하였는데 낙재를 경앙(景仰)한다는 의미였다. 서당의 북쪽 푸른 절벽은 ‘영귀대(詠歸臺)’라 하였고, 서당의 서쪽 석대(石臺)는 ‘관란대(觀瀾臺)’라 하였다.

이락서당은 세월이 흘러 퇴락해져 1939년에 중수하였다. 2010년에 옛 서당을 헐고 새롭게 중건하면서 진입로가 확장되었고, 외부 조명을 설치하여 강창교 위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밤에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락서당의 위치]

이락서당달서구 파호동 45-1에 있는데, 대구 성서에서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가는 방향으로 금호강 위에 세워진 강창교 오른편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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