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45
한자 北區- 文化遺産
영어공식명칭 Cultural Heritages in Buk-g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배성혁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의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주요한 문화유산.

[개설]

북구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7건, 사적 2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1건, 무형문화재 1건, 기념물 1건, 문화재자료 2건 등 모두 14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이 중 보물 7건은 경북대학교의 소장품으로 북구 지역의 문화재로 보기는 어렵다. 비지정문화재는 신석기~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발굴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특히 금호강과 그 지류인 팔거천동화천 일대에는 청동기시대의 분묘와 대규모 취락, 초기철기시대의 분묘와 취락, 원삼국~삼국시대의 고분군과 산성,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이르는 공해 관련 유적들과 각종 생활·생산·분묘 유적들이 조사되어 문헌에는 없는 북구의 역사를 복원하여 주고 있다.

한편,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의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

1. 보물

대구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보물 제135호, 1963. 1. 21. 지정, 경북대학교 소장]: 일본인의 집에 있던 것을 경북대학교로 옮긴 것으로 원래의 위치나 주인공은 알 수 없다. 고승의 사리를 모셔 두던 승탑으로 전체적으로 8각의 양식을 잘 따르면서도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보물 제258호, 1963. 1. 21. 지정, 경북대학교 소장]: 일본인의 집에 있던 것을 경북대학교로 옮긴 것으로 원래 위치나 주인공은 알 수 없다. 고승의 사리를 모셔 두던 승탑으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각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고려시대 승탑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분청사기 상감연화문 편병[보물 제268호, 1963. 1. 21. 지정, 경북대학교 소장]: 분청사기 특유의 획일적으로 무늬를 찍는 인화문과 표면에 백토를 씌우는 분장법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고려청자와 유사한 질감을 가지고 있어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크기는 높이 19.1㎝이다.

백지은니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0[보물 제271호, 1963. 1. 2.1 지정, 경북대학교 소장]: 삼베로 만든 종이에 은색 글씨로 불경을 옮겨 적은 것으로, 능엄경 10권 가운데 마지막 권이다. 책의 맨 끝부분에는 1365년(공민왕 5) 이방한이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35호, 1963. 1. 21. 지정, 경북대학교 소장]: 좁은 어깨와 밋밋한 가슴, 작은 체구, 옷모양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신라 경문왕 3년(863)에 만들어진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구 무술명 오작비[보물 제271호, 1963. 1. 21. 지정, 경북대학교 소장]: 1946년 대구부 대안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에서 발견된 후 당시 대구사범대학에 보관되던 중 한국전쟁 때 7~8년 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수영장 부근에서 다시 발견되어 현재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는 적갈색의 자연석의 표면을 연마하지 않고 그대로 글을 새겼으며, 크기는 높이 103㎝, 상부 너비 65.8㎝, 하부 너비 53.8㎝, 두께 12㎝이다. 비의 내용은 건립날짜와 저수지 축조 내용 및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조성 연대는 무술년(戊戌年)의 간지를 통하여 518년(법흥왕 5)과 578년(진지왕 3)에 세웠다는 설이 양립한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 제997호, 1989. 4. 10. 지정, 경북대학교 소장]: 북지리의 마애불좌상 옆에 있던 것을 1966년 경북대학교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전체 높이는 1.6m 정도이며 삼국시대 말~통일신라 초에 조각된 우수한 작품이다.

2. 사적

대구 구암동 고분군[사적 제544호, 2018. 8. 7. 지정]: 함지산 정상의 팔거산성과 조합을 이루며 서쪽 능선에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1942년 『조선보물유적조사자료』에 소개된 후 2015년 정밀 지표조사를 통하여 379기의 봉토분이 유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대형 봉토분은 주로 능선을 따라 열상으로 분포하며, 소형분은 사면부에 입지한 것이 많다. 발굴 조사는 1975년 제56호분, 2015년 제1호분, 2019년 제56호분 재조사, 2020년 제58호분 등 네 차례 진행되었다. 대형분의 매장 주체부는 지상식의 주곽(主槨)과 부곽(副槨)을 11자 형태로 나란히 배치하였고, 그 위로는 적석으로 봉토를 쌓았으며, 이후 봉토를 일부 절개하고 배장하거나 여러 번 연접하여 작은 고분들을 축조한 양상을 보인다. 5~6세기에 조성한 삼국시대 팔거리현(八居里縣)의 수장층 무덤군으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적석봉토분 및 연접·다곽분 형태의 독특한 축조 방식을 하고 있다.

팔거산성[사적, 2023.6.27. 지정]: 함지산[287.7m] 정상에 축조되어 있으며, 구암동고분군과 조합을 이룬다. 노곡동산성, 독물성, 함지산성, 반티산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16세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의 자료에 폐성된 성터로 기록되어 있다. 성곽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는데, 동쪽 성벽은 능선 정상을 따라 쌓았고, 서쪽 성벽은 바깥쪽 둘레의 사면에 돌과 흙을 이용한 편축법으로 축조하였다. 2020년 집수지를 대상으로 발굴 조사된 바 있다. 조성 시기는 구암동 고분군과 동일한 5~6세기로 보인다.

[대구광역시 지정문화재]

1. 유형문화재

신간삼략언해[유형문화재 제68호, 2013. 10. 30. 지정]: 중국의 고대 군사이론서인 『삼략(三略)』을 이상징(李商徵)이 언해하여 1711년에 충청도 홍주의 신평에서 개간한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삼략』의 언해본 중에서는 그 시기가 가장 앞서는 판본이다.

2. 무형문화재

대고장[무형문화재 제12호, 1996. 5. 27. 지정]: 대고(大鼓)는 큰북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대구의 김종문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큰북 제작의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3. 기념물

국우동탱자나무[기념물 제10호, 1992. 9. 8. 지정]: 국우동에는 옛날 울타리로 심었던 수령 400년의 탱자나무 세 그루가 있다. 서쪽의 것은 지면 가까이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가 나뉘었는데 밑둘레가 1.7m에 이른다. 맨 동쪽의 것은 높이 0.7m, 밑둘레 1.4m이다.

4. 문화재자료

구암서원 숭현사[문화재자료 제2호, 1982. 3. 4. 지정]: 고려 말~조선 초의 인물인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다.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 세웠고,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그 후 1924년 유림이 다시 지었다. 숭현사는 강당 뒤에 위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구조를 하고 있다.

칠곡향교 대성전[문화재자료 제6호, 1982. 3. 4. 지정]: 칠곡향교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1398년(태조 7)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대성전 17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1907년에 크게 보수한 바 있으며, 5성(五聖), 송조 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비지정문화재]

북구의 역사는 매장문화재에 대한 지표조사와 70여 차례 진행된 발굴 조사를 통하여 그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화석유적으로는 노곡동 공룡발자국이 확인된 바 있다. 확인된 유적은 신석기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생활유적들이 대부분인데, 그중에서도 청동기시대 분묘와 대규모 취락유적, 원삼국~삼국시대 고분군,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이르는 칠곡 일대의 공해 관련 유적들이 북구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1. 선사시대

북구의 역사는 늦어도 신석기시대부터 전개되었음을 유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동화천변 충적지에서 확인된 서변동 취락유적에서는 주거지 1기, 집석유구 3기, 수혈 8기에서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토기와 돌삽, 갈돌, 숫돌과 같은 석기류가 출토되었는데, 남부 지역 신석기시대 후기~말기의 특징을 보인다. 이와 더불어 금호강 하류역의 다사면의 달천리 135유적에서도 중·후기의 야영지가 발견되어 금호강동화천 일대에 신석기문화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분묘와 생활유적이 주류를 이루며, 칠곡분지를 가로지르는 팔거천연경동, 동변동, 서변동을 지나는 동화천 일대의 넓은 충적지 일대에 분포한다. 그리고 팔달동 유적과 같이 나지막한 능선에 조성된 유적도 있다. 알려진 유적은 20여 개소이며, 팔거천 일대의 동천동 취락유적과 매천동 154유적, 동화천 일대의 서변동 취락유적이 대표적인 중심 취락이다. 분묘는 생활유적들과 동일한 공간에 조성되어 있는데, 모두 길이 1m를 넘지 않는 소형 돌널무덤이고 주변에서 고인돌의 상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돌널무덤은 동천동 취락유적[6기], 서변동 취락유적[6기], 읍내동 산76유적[1기], 연경동 유적Ⅰ구역[6기] 등 4개소에서 19기가 조사되었다. 취락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주거지는 9개소에서 167기가 확인되었는데, 유적에 따라 2~60기가 조사되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한편,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유적들이 시기적인 차이를 두고 각각 중심 취락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천동 취락유적에서는 60기의 주거지 중에 전기의 장방형은 3기이고, 후기의 송국리형은 47기로 주류인 데 비하여, 서변동 취락유적에서는 48기의 주거지 중 전기의 장방형이 42기로 주류이고 후기의 송국리형은 6기이다. 그리고 주거지 외에도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는데, 고상가옥은 4개 유적에서 68기가 확인되었으며, 수혈, 구, 집석, 우물, 집수지, 환호, 하도, 추정경작지 등은 유적마다 그 수량과 성격 차이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동천동 취락유적에서는 주거지[60기], 고상건물지[20기], 수혈[87기], 집석[10기], 우물[10기], 돌널무덤[6기], 구[12기], 야외노지[5기], 집수지[2기], 추정경작지[2기], 환호[4기], 하천 등이 조사되어 대규모 취락을 구성하던 성격별 유구의 전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 밖에 서변동 취락유적과 매천동 154-3유적에서 조사된 소하천에서는 나무로 제작한 도끼자루, 절구공이, 고무래 등이 출토되어 다양한 도구의 사용과 경작지에서 곡물을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 유적은 상대적으로 적은데, 청동기시대 또는 원삼국시대 유구와 혼재되어 있어 구별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알려진 유적은 7개소로 팔거천 변에는 국우동 유적팔달동 유적, 학정동 474-5유적, 학정동 515-3유적, 학정동 372-1유적이 있고, 대구분지 내에는 연암산 선사유적침산 선사유적이 있다. 국우동 유적에서는 독무덤, 주거지, 수혈, 고상가옥, 구, 늪 등이 조사되고, 학정동 일대의 유적에서는 하도, 구, 수혈 등이 확인된다. 유물은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각종 석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연암산침산의 정상부 일대에서는 유구석부, 석착, 석부, 석촉, 석도, 민무늬토기, 옹관, 두형토기, 어망추 등이 다량 채집되었는데, 특히 유구석부 제작의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단계별 석재가 출토되었다. 팔달동 유적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등이 출토되는 나무널무덤 5기가 확인되었는데,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무덤이다.

2. 원삼국 및 삼국시대

원삼국 유적은 팔거천동화천 변의 능선에서 6개소가 알려져 있으며, 분묘와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대구의 대표적인 원삼국시대 분묘군인 팔달동 유적에서는 2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초기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 전환하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나무널무덤과 토광묘 114기, 나무덧널무덤 1기, 독무덤 139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세형동검, 동과를 비롯하여 각종 철기류, 점토대토기, 장경호, 주머니호, 편구호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 외 서변동고분군①에서는 나무덧널무덤 91기, 서변동고분군②에서는 나무덧널무덤 1기와 주거지 10기, 사수동 563유적에서는 나무널무덤 15기와 독무덤 2기, 학정동 474유적에서는 나무널무덤 7기·독무덤 7기·토광묘 4기, 학정동 485유적에서는 기원전 2세기 후반~1세기 전방에 축조된 나무널무덤 40여 기가 확인되었다. 이로 보아 북구 전역에서 원삼국문화가 전개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유적은 38개소가 알려져 있는데, 칠곡분지 일대에 주로 분포하며, 금호강동화천 일대에 일부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구암동 고분군[사적]과 조합을 이루는 팔거산성[기념물], 팔달동 유적 등이 있다. 조성 시기는 4세기에서 7세기까지 지속되며, 중심 시기는 5~6세기이다. 분묘는 13개소가 조사되었는데, 구암동 6유적, 구암동 고분군, 금호동 고분군①~②, 동변동 고분군, 복현동 고분군, 사수동 563유적, 서변동 고분군①~②, 연경동 유적Ⅰ구역, 읍내동 산76유적, 조야동 산69-2유적, 팔달동 유적이 있다. 팔거리현의 수장층 무덤이 조영된 구암동 고분군에서는 대형분인 제1·56·58호분과 연접되거나 배장된 수십 기의 돌덧널무덤·돌방무덤이 조사되고, 팔달동 유적에서는 나무덧널무덤 22기와 석곽(실)묘 36기, 사수동 563유적에서는 돌덧널무덤 27기, 돌방무덤 1기, 독무덤 2기, 토기가마 1기, 서변동 고분군Ⅱ에서는 나무덧널무덤 3기와 돌덧널무덤 37기가 조사된 바 있다. 생활유적은 모두 팔거천변 칠곡분지 일대인 구암동, 동천동, 동호동, 학정동 일대에서 15개소가 확인되었는데, 서로 연결되는 대규모 취락으로 팔거리현과 관련된 중심 취락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수동 유적에서는 누자식 건물 55기가 확인되어 6~7세기 대규모 취락의 모습을 잘 보여 주며, 동천동 380유적에서는 보시설, 저수시설, 물막이시설, 둑 등 경작과 관련한 수리시설이 확인된 바 있다.

3. 통일신라~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 유적은 절터 1개소와 건물지, 고상가옥, 주거지, 수혈, 우물, 구, 매납유구 등이 조합된 생활유적, 단야로, 토기가마 등 철과 토기를 만들던 생산유적 등 10개소가 알려져 있다. 절터로는 신라 운암사(雲岩寺) 터로 알려진 구암동사지함지산 동쪽 계곡에 위치하며, 읍내동 마애불상군도 신라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생활유적 중에는 8세기 초반~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 팔리현(八里縣)과 관련된 유적들이 있다. 읍내동 491유적에서는 취사와 난방이 가능한 쪽구들을 갖춘 주거지 14기와 우물 등이 조사되어 공해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구암동 병영지 유적에서는 임시 거주시설과 관련된 수혈 331기와 구 32기, 고상가옥 39기 등이 조사되고, 철로 제작된 무기류 2,000여 점이 출토되어 군사주둔시설로 보고되었다. 한편, 금호강 동편의 연경동 취락유적에서는 건물지 17기, 주거지 70기, 고상가옥 8기, 담장지 5기, 적석 13기, 석축배수로 4기 우물 5기, 수혈 38기, 소성유구 11기, 단야로 1기, 가마 2기, 폐기장 1기 등 다양한 생활·생산유구가 조사되었는데, 금호강 동안의 해안현과 관련된 취락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려시대 유적은 분묘와 생활유적, 생산유적 등 11개소가 알려져 있다. 분묘는 관음동 400유적과 읍내동 491유적에서 각각 돌덧널무덤 1기가 확인되었다. 생산유적은 관음동 400유적에서 기와·토기 폐기장, 금호동 79유적에서 토기가마, 사수동 563유적에서 기와가마가 조사된 바 있다. 생활유적은 국우동 285유적, 금호동 79유적, 사수동 유적, 사수동 563유적, 서변동 860-1유적, 연경동 취락유적, 학정동 175유적, 읍내동 491유적에서 조사되었다. 이 중 읍내동 491유적에서는 팔거현의 관청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4동과 주거지 18기를 비롯하여 우물, 구, 매납유구, 저장유구, 수혈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삼국~고려시대 칠곡분지 내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칠곡의 과거 명칭 변화와 더불어 중심지의 이동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삼국시대에는 팔거천 동쪽의 구암동, 동천동 일대가 팔거리현(八居里縣)의 중심지로 배후에 팔거산성구암동 고분군을 조성하였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팔거천 서쪽의 읍내동 일대로 팔리현(八里縣)의 중심지를 옮겼으며, 고려시대에는 팔거현(八居縣, 八莒縣)으로 개칭되지만 읍내동 일대가 지속적으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4. 조선시대~근대

조선시대 유적은 건조물과 자연유산, 그리고 발굴 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칠곡도호부의 공해 관련 건물지 등이 알려져 있다. 현존 건조물은 14개소로 사당, 재실, 일반가옥, 누정, 비와 비각 등과 왕실과 관련된 태실, 지방공해 건물의 하나인 향교 건물이다. 검단동압로정[조선], 노곡동판관서유교 영세불망비[조선 후기], 도남동유화당[1744년], 동변동능성구씨 화수정[1828년], 동호동의 도산재[1852년], 산격동용담재[1650년]와 서명보 효자각[조선], 서변동송계당[1659년, 1960년 중건]과 환성정서계서원[조선 말], 서변동판관이징해 영세불망비[조선], 연경동광해군 태실[1581년]과 오사재[1760년], 읍내동칠곡향교[17세기 초]가 알려져 있다. 자연유산은 11건으로 매천동 은행나무[800년], 연경동 느티나무[1000년], 국우동탱자나무[400년], 국우동 느티나무[450년, 150년], 도남동 느티나무[250년], 동변동 느티나무[500년]와 동변동 왕버들나무[150년], 복현동 느티나무[200년], 서변동 왕버들나무[150년], 읍내동 팽나무[300년], 산격동 모감주나무[100년]가 각각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발굴 유적은 16개소로 분묘와 공해유적, 생산유적, 생활유적이다. 분묘는 팔달동 유적[146기], 구암동 6유적[2기], 사수동 563유적[5기] 등에서 토광묘가 조사되었고, 광해군 태실에서는 태함 안치를 위한 토광, 귀부, 개첨석, 아기태실비와 가봉태실비 등이 확인되었다. 공해유적으로는 읍내동 491유적에서 팔거현의 향청지, 읍내동 산76번지에서 칠곡도호부의 사직단지가 밝혀졌으며, 동호동 181유적은 팔거현의 형옥 또는 여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생산유적으로는 기와가마와 옹기가마가 확인된 동호동 181유적, 사수동 563유적, 연경동 취락유적이 있고, 학정동 300유적에서는 채토장 43기, 팔달동 산14-1유적에서는 대구읍성 성벽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이 확인된 바 있다. 생활유적으로는 건물지, 주거지, 우물, 집수정, 석조, 석축렬, 수혈 등이 확인된다. 이 중 사수동 유적의 B구역에서는 영남을 대표하는 한강 정구[1543~1620]가 마지막으로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며, 1617년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사양정사(泗陽精舍)의 터가 확인되었고, C구역에서는 팔거창(八莒倉)과 관련된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다.

근대의 유적은 1876년 개항 이후의 건축된 재실과 가옥, 비와 비각 등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구암동운곡서당[1932년]과 이인술 주택[1905년], 국우동도남정사[1899년], 노곡동영모재[1917년]와 태충각[1900년 경], 노원동의 효사각[1893년], 도남동도남재창열각[1932년], 동변동영사재[1893년], 산격동체화당[1959년], 읍내동구천서당[1936년]이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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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2 현행화 [개설] 지정문화재 현황 수정 [대구광역시 지정문화재] 3. 기념물 팔거산성 문단 → [국가지정문화재] 2. 사적 팔거산성 문단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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