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748
한자 宦蹟
영어음역 Hwanjeok
영어의미역 Roster of Administrator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김양수

[정의]

관청이나 고을에 과거 부임하였던 전임관, 수령 등 벼슬아치의 명단.

[연원]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과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관직명·생년·본적·취임 및 이임시기(移任時期)·치적(治績) 등을 적어놓은 책으로 일명 『안책(案冊)』이라 하기도 하고 흔히 지방에는 「수령안(守令案)」이라고 하여 명단이 전하고 있다.

작성 시기를 기준해 볼 때 등재 인물이 현임자의 전임자(前任者)라는 데서 선생안(先生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형태]

관직을 대상으로 한 것에 판서와 같은 선생안이 있고, 기관을 단위로 할 때에는 『삼공선생안(三公先生案)』이 있었다. 지방관아의 것으로는 각도의 감사와 수령을 대상으로 한 『도선생안(道先生案)』, 『읍선생안(邑先生案)』 등이 있었다.

[청주읍지의 환적 분석]

『청주읍지(淸州邑誌)』에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청주의 지방관 명단과 간단한 설명을 기록해 놓았다. 신라시대에는 원태(元泰) 1명, 고려시대에는 이세화(李世華) 등 8명이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원증(李元增)까지 청주지역의 수령을 역임하였던 명단이 확인된 것은 259명이었다. 대체로 조선후기 이후의 기록이 더욱 자세하다.

또한 『청주읍지(淸州邑誌)』의 병영조(兵營條)에는 이옥(李沃) 등 역대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를 지냈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47명, 중영장(中營將)의 명단, 그 다음에 상당산성(上黨山城)을 관할하던 우후(虞侯)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에 청주수령을 지냈던 인물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청주수령의 출신성분

1) 출신구분

18세기에 발행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청주목사는 문관이나, 혹은 음관(蔭官) 정3품으로 임명하고, 6년마다 교체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수령은 인구와 지역의 다소에 따라서 처음에 행정구역의 크기를 정하였어도, 그 지방의 충역사건(忠逆事件)의 발생 여하에 따라서 청주목 같은 고을도 서원현으로 강등된 경우가 있어서 그런 때에는 6품의 현감이 수령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청주수령을 역임한 인물은 현재 확인된 숫자가 모두 259명으로, 충청감사보다 적은 숫자이다. 15~16세기 조선 전기의 청주수령 출신성분은 65명 가운데, 28명이 문과 급제자로서 43.8%를 차지하였다. 무과 출신자도 4명이 조사되었다.

15세기 수령 중에서는 유명한 인사의 기록만 남아서 문과 급제율이 7할에 가까우나, 16세기에는 판관(判官)이 청주수령을 역임한 기록도 많아 문과 급제자가 4할 정도로 하향(下向)하였다. 16세기에는 무관 출신이 7.7%에 이르고 음관도 6명으로 11.5%에 이르는 등 15세기에 비해 문관의 비율이 낮아졌다.

17~19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에 청주 수령직은 194명중 140명이 문과 급제자에게 제수되어 72.2%를 차지하였다. 음관 출신은 53명으로서 27.3%를 차지하였고 무과 출신은 1명으로 0.5% 정도였다. 대부분의 음관 출신자들은 조선 후기에 집중되었다.

2) 청주수령의 성씨

청주수령의 성씨를 보면 조선전기 청주수령 64명은 20성 35본관에 걸쳐 있었다. 그중 첫째가 4명을 배출한 안동 권씨이고, 둘째가 3명을 배출한 파평 윤씨였다. 셋째는 2명씩 배출한 안동김씨, 영광 김씨, 여흥 민씨, 광주이씨, 덕수이씨, 전주이씨(全州李氏), 한산 이씨였다. 아직 특출한 성씨가 없고, 대체로 여러 씨족에 고루 분배되었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 청주수령 191명은 31성 72본관에 걸쳐 있었다. 그중 첫째는 전주이씨가 16명(8.4%), 둘째는 안동김씨가 10명(5.2%), 셋째는 연안 이씨가 8명(4.2%)이었다. 다음 넷째로 파평 윤씨가 7명(3.7%), 다섯째로 동래 정씨가 6명(3.1%), 그리고 남양홍씨도 6명이었다.

일곱째는 청풍 김씨가 5명(2.6%), 그리고 전의이씨도 5명(2.6%)이었다. 아홉째는 4명(2.1%)씩 배출한 밀양박씨(密陽朴氏)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 청주수령 가운데 십대성(十大姓)이 차지한 비율은 37.2%였다. 위에서 청주수령을 배출한 성씨는 상위권에서는 충청감사를 배출한 유력한 성씨 가문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3)청주수령의 거주지

조선시대 청주수령 가운데 거주지를 알 수 있는 97명을 분류해 보면 서울 거주자가 82명으로 가장 많아서 84.5%를 차지하였다. 경기도는 4명으로 4.1%, 충청도 역시 4명으로 4.1%였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각기 2명으로 각각 2.1%였다. 그밖에 황해도가 1명으로 1%였다.

그런데 서울은 조선 초기부터 나타나 전 시기에 걸친 반면에 충청도와 전라도는 조선 후기인 17세기부터 나타났고, 경상도는 이보다 빠른 16세기에 강세를 보이고, 18세기 이후에는 없었다. 위에서 거주지가 밝혀진 청주수령 가운데 압도적으로 서울 거주자가 많아서 8할 이상이나 되었다.

4)청주수령의 관품과 관직

청주수령의 관품과 관직을 살펴보면 조선 전기 청주수령에 임명되기 전의 관직은 자료가 미상인 것이 많다. 임명 직전 관직이 밝혀진 13명 가운데는 관찰사(觀察使), 목사(牧使), 도호부사(都護府使)에서 정언(正言)까지 종2품~종6품직을 지냈다. 조선 전기에 청주수령 직전 관직이 규명된 사료에서는 당상관(堂上官)이 9.2%, 당하관(堂下官)이 10.8%였다.

조선 전기 청주수령에서 교체된 관직은 내금위장(內禁衛將), 승지(承旨)로부터 정랑(正郞)까지 종2품~정5품까지 있다. 당상관이 된 것이 13.8%, 당하관이 4.6%인데 미상자가 대부분이었다. 최고관직에 이른 기록 가운데 당상관은 23.1%, 당하관은 1.5%였다.

조선 후기의 청주수령 관직은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17세기에 일부 규명된 자료에서 수령 임명 직전에는 종2품 참판으로부터 정9품 정자(正字)까지 관직에 있다가 수령 교체 때에는 종2품 관찰사에서 종3품 부사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청주수령 출신의 최고 경력으로는 정2품 판서에서 정3품 판결사(判決事)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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