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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고려초에 활동한 청주의 호족. 청주 출신의 호족으로 청주의 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었다. 918년(태조 1) 7월 부장(副將) 연익(連翌)·흥현(興鉉)과 함께 개경에 가서 태조(太祖)를 예방하자 태조는 이들에게 각각 말과 비단을 차등있게 주었다. 이때 견금(堅金)은 개경에 있는 청주 출신 김근겸(金勤謙), 관준(寬駿), 김언규(金言規) 등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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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지방의 토호. 962년에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에 전사창(前司倉), 대사(大舍)의 직을 띠고 있다. 대사는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12번째에 해당한다. 당간기에 보이는 김(金), 손(孫), 경(慶), 한(韓) 4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청주의 유력 토착세력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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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장군.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경진(慶珍)의 아들이다. 경대승(慶大升)의 동생은 이소응의 사위이다.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가사를 돌보지 않았다. 15세에 음보로 교위(校尉)가 되었으며 뒤에 장군에 이르렀다. 아버지 경진은 욕심이 많아 남의 토지를 빼앗아 재산을 많이 모았는데, 그가 죽자 경대승이 토지를 모두 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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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 매곡(昧谷)의 호족.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정권을 잡자 청주 출신의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이 반역의 음모를 하고 청주로 돌아가려 할 때, 경종은 그의 반역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복지겸(卜智謙)의 보고에 의해 이들은 체포당하여 모두 다 죄를 인정하였다. 이에 모두 금고(禁錮)처분을 받았다. 이때 청주 출신의 현율(玄律)이라는 인물이 태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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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지방의 토호. 962년에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에 전병부경(前兵部卿), 대나마(大奈麻)의 직을 띠고 있다. 대나마는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10번째에 해당한다. 같은 기록에 보이는 대사(大舍) 경기준(慶奇俊)보다는 지위가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당간기에는 김(金), 손(孫), 경(慶)·한(韓) 4성씨가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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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때 연산 매곡(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출신의 호족. 아내는 경종(景琮)의 누이이다. 어려서부터 용략이 있었으며, 신라말의 혼란기에 본읍의 장군(將軍)을 칭하였다. 처남인 경종이 친궁예의 성향을 보이다가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처형당하였다. 이후 공직(龔直)은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속하였던 것 같으며, 맏아들 공직달(龔直達), 둘째아들 공금서(龔金舒)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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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곽열(郭說)의 아들이다. 아들에 곽원(郭垣)과 곽여(郭輿)[1058~1130]가 있다. 처음에는 청주의 향리였으나 선종(宣宗)을 잠저 시절에 섬기었는데, 선종이 즉위하면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1086년(선종 3)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요나라에 토산물을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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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몽득(夢得)으로 곽상(郭尙)의 아들이다. 어려서 꿈에 어떤 사람이 여(輿)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이름을 삼고 몽득으로 자를 삼았다. 어려서부터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으며,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싫어하고 항상 홀로 한방에 거쳐하여 학문에 힘썼다.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부(內侍府)에 속했다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거쳐 홍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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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996년(성종 15)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1011년(현종 2)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를 역임하였고, 1015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치고, 겸하여 거란이 해마다 내침함을 고하고 위태할 때 구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1016년 형부시랑(刑部侍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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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 출신의 인물. 청주인으로 고려 초에 서울에 와 있던 인물이다. 태조(太祖)의 즉위 초에 청주 출신의 견금(堅金)과 관준 등이 서울에 있으면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하면서 없애버릴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향의 인물로부터 참소를 당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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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 인근 출신의 인물. 928년(태조 11)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에 보낸 글에 간단히 언급된 인물이다. 즉 연산군(燕山郡) 지경에서 길환(吉奐)을 목베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길환은 친 견훤의 정치적 입장을 보인 인물로서 고려의 왕건에 의해 죽음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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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 청주지방의 토호. 962년에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에 대등(大等)의 직을 띠고 있다. 대등은 983년(성종 2) 향리직 개편시에 부호장(副戶長)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데, 부호장은 호장 다음의 위상이다. 따라서 청주의 유력 토착세력으로 볼 수 있다. 김씨(金氏)는 당시 당간의 건립을 주도한 김(金), 손(孫), 경(慶), 한(韓) 4성씨 가운데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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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 출신의 재경 관인.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정권을 장악했을 무렵 수도에 있던 청주 출신의 인물이다. 태조가 즉위 초에 청주인의 동정을 살피려고 청주 출신의 능달(能達), 문식(文植), 명길(明吉)을 청주에 보냈는데, 능달은 믿을 만하다고 말했으나, 문식과 명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그 사실을 김근겸(金勤謙)에게 말하였다. 그런 사실에서 김근겸은 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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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지방의 토호. 962년에 쓰여진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에 대등(大等)의 직을 띠고 있다. 대등은 983년(성종 2) 향리직 개편시에 부호장(副戶長)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데, 부호장은 호장 다음의 위상이다. 따라서 청주의 유력 토착세력으로 볼 수 있다. 철당기에는 김씨(金氏) 성을 가진 인물이 여럿 보이며 직위가 다른 성씨보다 높아 청주의 성씨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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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지방의 토호. 962년에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에 대등(大等)의 직을 띠고 있다. 대등은 983년(성종 2) 향리직 개편시에 부호장(副戶長)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데, 부호장은 호장 다음의 위상이다. 따라서 청주의 유력 토착세력으로 볼 수 있다. 「용두사당간기(龍頭寺幢竿記)」에 김수△라고 나오는데 그 인물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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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 출신의 인물. 918년 태조(太祖)가 정권을 장악한 직후에 관직을 전면 재임명하였을 때 김언규(金言規)는 일길찬(一吉湌)으로 백서성경(白書省卿)에 임명되었다. 태조 초 청주 출신의 견금(堅金)으로부터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고 무고당하였다. 그러나 김언규가 그것을 알고 견금을 체류시키고 관찰하도록 아뢰자, 태조가 김언규의 말을 따랐다. 사무에 능숙하고 청렴하였으며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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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 청주지방의 토호. 용두사 철당을 세울 것을 발원한 인물이다. 962년에 쓰여진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에 당대등(堂大等)의 직을 띠고 있다. 당대등은 983년(성종 2) 향리직 개편시에 호장(戶長)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토호층의 최상층이다. 고을의 호가(豪家), 향려(鄕閭)의 관족(冠族)으로 일컬어졌으며, 뜻밖의 병에 걸려 부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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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지방의 토호. 962년의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를 직접 짓고 글씨를 직접 썼다. 전한림학생(前翰林學生)의 직을 띠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청주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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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문신, 청주목의 부사(副使).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강원도 명주(溟州)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우보궐(右補闕)을 거쳐 청주목의 부사(副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비서소감(祕書少監)이 되었다가 1111년(예종 6)에 전중감(殿中監)으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듬해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다시 요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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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청주목의 부사(副使).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명주(溟州)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우보궐(右補闕)을 거쳐 청주목의 부사(副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비서소감(祕書少監)이 되었다가 1111년(예종 6)에 전중감(殿中監)으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듬해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다시 요나라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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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지방의 토호. 용두사 철당간을 완성하였다. 철당간을 세울 것을 발원한 이는 김예종(金芮宗)이었지만, 그의 뒤를 이어 김희일(金希一)이 완성하였다. 30단의 철통을 주조했으며 60척의 당주를 세웠다. 김예종의 종형(從兄)이었으며 당대등(堂大等)·정조(正朝)의 직을 띠었으며, 단은어대(丹銀魚袋)를 하사받았다. 당대등은 뒷날의 호장이었으며, 정조는 7품에 해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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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청주 출신의 무신. 청주를 기반으로 했던 호족으로서 왕경에 초치된 인물로 보인다. 궁예(弓裔)가 청주 주민을 철원에 이전시킨 이래 이미 청주를 떠나 상경하여 종사하는 세력과 아직 토착해 있는 현지세력이 상호 시기·반목하였으며, 지방 세력 내부에서도 대립하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과의 관계에서 청주세력은 충역(忠逆)이 무상하였다. 태조는 즉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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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 청주 출신의 관리.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냈을 때 재경청주인은 왕건파와 궁예파로 나뉘었는데, 명길(明吉)은 친왕건파였다. 즉위한 직후 청주지방 호족세력의 동향에 대해 염려를 하던 태조는 재경청주인 문식(文植)·능달(能達)과 함께 청주에 파견하였다. 돌아와 동향출신의 김근겸(金勤謙)·관준(寬駿)에게 청주지방의 반란을 조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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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 청주 출신의 재경관인.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재경청주인은 왕건파와 궁예파로 나뉘었는데, 명길(明吉)은 친왕건파였다. 태조는 즉위한 직후 청주지방 호족세력의 동향에 대해 염려를 해서 재경청주인 명길, 능달(能達)과 함께 청주에 파견하였다. 돌아와 동향출신의 김근겸(金勤謙), 관준(寬駿)에게 청주지방의 반란을 조짐이 있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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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 청주 출신의 인물. 왕건(王建)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무렵 재경청주인은 궁예파와 왕건파로 나뉘었다. 배총규(裵悤規)는 반왕건적인 성향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왕건의 쿠데타 직후 청주 출신의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 등이 강길(康吉), 아차귀(阿次貴), 경종(景琮)과 함께 반역의 음모를 꾸미고 청주로 돌아가려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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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의 서기사(瑞氣寺)에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의 광배. 조성 시기는 대략 고려 중기 이전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전체높이(全高) 78㎝, 중간 폭(中幅) 61㎝, 아래 폭(下幅) 55.1㎝, 두광 지름(頭光經) 26.4㎝이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화염(火炎)으로 다시 둘러싸도록 한 배 모양의 광배(舟形光背)로서 융기선(隆起線)으로 내외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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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 청주 출신의 호족. 왕건(王建)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자 청주인 가운데 이에 반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두령 파진찬의 지위에 있던 진선(陳瑄)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장(宣長)은 진선의 아우로서 함께 반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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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인정권 초기의 무신. 경대승(慶大升)의 족형으로 경대승이 정권을 장악하였을 때 크게 활약하였다. 손석은 자신의 부친이 수령으로서 탐학을 일삼아 오광척이 탄핵하자, 이후 오광척을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경대승이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자, 경대승을 꾀어 오광척을 죽이고 아울러 장군 김광영 등을 잡아 죽였다. 1179년(명종 9)에 장군으로서 금나라에 가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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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인물. 청주사람으로 궁예(弓裔)가 나라를 다스릴 때 같은 고을 사람인 아지태(阿志泰)에 의해 입전(笠全), 관서(寬舒) 등과 함께 참소를 당하였다. 이 일을 해당관리가 심리하였으나, 수년이 지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다. 이때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사건의 흑백을 분간하여 판결을 내려주어 일이 잘 해결되었다. 이 일로 인해 군문의 장교, 종실, 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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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매장유적. 청주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해발 60~115m쯤의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역 일대를(1,001,840㎡) 청주 봉명지구·신봉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 지구로 지정하여 토지구획 정리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 지역 일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토지구획 정리사업은 청주시에서 주관하여 시행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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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인물. 청주사람으로 궁예(弓裔)가 아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같은 고을(청주) 사람인 입전(笠全)과 신방(辛方) 그리고 관서(寬舒) 등을 참소하였다. 이 참소를 해당관리가 심리하였으나, 수년 동안이나 판결이 나지 않자 고려 태조(太祖)가 그 흑백을 분간하여 판결을 내리니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였다. 태봉의 궁예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같은 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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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청주사람으로 태봉 때 청주에서 무신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궁예(弓裔)는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여 청주의 호걸들이 사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궁예는 장차 청주사람을 모조리 없애버릴 목적으로 청주에서 군인으로 있던 애견(愛堅), 윤전(尹全) 등 8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불러 죽이려고 포박하여 끌고 오게 하였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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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청주사람으로 청주령군(淸州領軍)의 장군이었던 견금(堅金)의 부장(副將)으로서 활동하였다. 견금 역시 청주사람으로 청주령군의 장군으로 있었는데, 태조(太祖)가 즉위한 후 “청주사람들은 변심하는 일이 많으니 제때에 방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생길 것이다” 생각하고 드디어 그 고을 사람 능달(能達), 문식(文植), 명길(明吉) 등을 보내 엿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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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초명은 자림(子琳)이다. 현종 때 상주국 개성현 개국백(上柱國 開城縣 開國伯)의 봉작과 수충창궐공신(輸忠創闕功臣) 칭호를 받으면서 왕씨로 성을 하사받았으며, 그의 부인 김씨(金氏)는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에 봉해졌다. 왕가도(王可道)의 딸들은 현종 때 원질귀비(元質貴妃)가 되었으며, 덕종 때는 현비(賢妃)로 책봉되어 상회 공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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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예술가. 초명은 인(仁)이다. 어려서 과거에 합격하여 청근(淸謹)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청주목사가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공경하였다. 1087년(선종 4)에 예빈소경으로 있으면서 고주사(告奏使)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고, 1093년에는 공부시랑으로 사은부사(謝恩府使)가 되어 송나라에 가서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얻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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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태봉 때 청주에서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청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호걸이 많아 이들이 사변을 일으킬까 궁예(弓裔)는 항시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장차 청주 사람을 모조리 섬멸해 버릴 목적으로 군인으로 있던 윤전과 애견(愛堅) 그리고 8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포박한 채로 잡아오게 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한 후 이들이 무고하게 죽게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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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달부(達夫)이며, 호는 추월재(秋月齋)이다. 태조 때 공신 이희능(李希能)의 6대손이자 이겸의(李謙宜)의 5세손이다. 이공승의 아들은 이춘로(李椿老)와 이계장(李桂長)이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잘 지었고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直翰林)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 1148년(의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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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공제(公濟)이며, 아명은 이재(李載)이다. 아버지는 이유적(李攸績)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의 관직을 지냈다. 청주 사람으로 선종 때 소부주부(少府主簿)가 되어 왕의 명령으로 송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교정하였다. 그런데 송나라 연호를 써야 할 데다 그만 요(遼)의 대안(大安) 연호를 써서 송이 그 표문을 돌려보내 왔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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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918년(태조 원년) 순군리(徇軍吏)를 지냈다. 청주사람으로서 918년(태조 원년)에 순군리(徇軍吏)로 근무하였다. 이때 같은 고향사람인 청주의 배총규(裵悤規), 계천(季川)의 강길(康吉), 아차귀(阿次貴), 매곡(昧谷)의 경종(景琮)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청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것을 복지겸(卜智謙)이 먼저 알고 밀고하므로 태조(太祖)가 사람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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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인물. 청주사람으로 궁예(弓裔)에 의해 통치되던 태봉 때 같은 고을 사람인 아지태(阿志泰)에 의하여 신방(辛方), 관서(寬舒)) 등과 함께 참소를 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고려 태조(太祖)가 심리하여 그 흑백을 분간하여 판결을 내려주어 여러 사람들이 태조를 따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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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절도사의 칭호. 995년(성종 14) 전국의 12개 주에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청주에도 절도사를 두게 되었다. 그때 청주의 절도사를 전절군(全節軍)이라 부르고, 중원도(中原道)에 소속하게 하였다. 1012년(현종 3)에 이르러서 12주의 절도사를 폐지하니, 청주에도 역시 절도사가 폐지되면서 전절군이라는 칭호도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대에 1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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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어릴 때 이름은 준유(俊儒)이다. 그의 아들은 정현(鄭儇)으로 벼슬이 감찰어사에 이르렀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고종(高宗) 때 서경 어사대리(御史臺吏), 섭중낭장(攝中郞將), 장군, 시랑(侍郞),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청주사람으로 1217년(고종 4) 어사대(御史臺)의 관리로서 서경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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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光宗)[946~975]이 사용한 독자적인 연호(年號). 고려 4대 왕인 광종은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많은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예를 들면 노비안검법을 마련하여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양민이 되게 하였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특히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라 고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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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에 있는 불상. 청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서 불신과 광배 및 대좌가 한 개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높이 120㎝의 아담한 모양으로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비로자나불상이다. 청화사 측에 의하면 해방 직후에 대성동 동공원에서 옮겨 모셨다고 한다. 동공원은 중앙초등학교 동쪽의 당산(堂山)으로 일제강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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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었던 용두사 터에 있는 철제 당간지주. 밑에서부터 세 번째 철통에 철당간을 만들게 된 내력이 양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주성(鑄成) 기록에 의하면 이 철당간은 준풍(峻豊) 3년(고려 광종 13, 962)에 건립되었다. 이 당간은 당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호족(豪族)세력인 당대등(堂大等: 戶長) 김예종(金芮宗)의 원(願)에 의하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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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있는 한씨의 시조인 한란의 묘소.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 중의 하나이며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은 청주지역의 대표적 호족으로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봉해지고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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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918년(태조 원년) 한찬(韓粲)을 지냈다. 청주사람으로 일찍이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섬겼다. 태조 왕건이 918년 6월 병진에 포정전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였는데, 왕이 한찬 총일에게 “이전 임금(궁예(弓裔))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대의 고향인 청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호걸이 많아 이들이 사변을 일으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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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자는 정보(正甫)이고, 구명은 거린(巨鱗)이다. 중서주서(中書注書)로서 청주통판(淸州通判)이 되었을 때 정사를 돌봄에 있어서 이속(吏屬)들에게는 엄하고 백성들에게는 긍휼(矜恤)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좌사간에 이르렀고, 기거사인으로 서해도 안찰사가 되었다. 상주사록으로 있을 때에 청빈함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122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이 실각하자 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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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건국 공신 및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한지원(韓智原)이다. 형으로 한만, 한간이 있었으며, 동생은 한영이 있었다. 한란(韓蘭)[?~?]은 청주한씨의 시조이며, 그 선계(先系)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란은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그곳에서 향학(鄕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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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 918년(태조 원년) 순군낭중(徇軍郞中), 병부낭중(兵部郞中)을 지냈다. 청주사람인데, 태조(太祖)가 현율을 순군 낭중(徇軍郞中)으로 삼으니, 마군장군 배현경과 신숭겸(申崇謙)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임춘길(林春吉)이 순군리(徇軍吏)로 있으면서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사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병권을 잡고 있으며, 자기 고향(청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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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의 무신. 환선길은 동생 향식(香湜)과 함께 태조(太祖)를 섬겨 왕조 창업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환선길을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임명하고, 심복으로써 믿으면서 항상 정예군(精銳軍)을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宿衛)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처가 말하기를 “당신의 재주와 능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나므로 사졸(士卒)들이 당신에게 복종하고 있으며, 큰 공훈을 세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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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의 청동 금구(靑銅禁口). 1984년 12월부터 한국토지공사가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운천동사지 발굴 조사를 진행, 운천동사지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 가강골 마을 515-1번지의 민묘 주변에서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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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고려 초의 무신. 청주사람으로서 청주 영군장군(領軍將軍) 견금(堅金)의 부장(副將)으로서 활동하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자 청주 영군장군 견금이 부장(副將) 연익(連翌), 흥현(興鉉)을 데리고 태조를 뵈오니, 각각 말과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태조가 즉위한 후 ‘청주사람들은 변심하는 일이 많으니 제때에 방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생길 것이다’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