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19
한자 -膳物-鹽田-
영어공식명칭 Gomso Salt Field’s People Who Cultivate a Heaven-sent Present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진명숙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곰소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이와 관련된 생활 풍속.

[개설]

전라북도 부안군은 북서쪽이 서해와 마주하고 있고 남쪽은 깊이 만입된 해안가와 접하고 있어 삼면이 바다와 접경해 있다. 그래서 흔히들 부안군을 ‘반도 중의 반도’라고 하였다. 이중환(李重煥)[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는 “골짜기 동네 밖에는 모두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의 집이다. 산 가운데는 좋은 밭과 기름진 두렁이 많아서 주민들은 산에 올라가서는 산채를 뜯고 산을 내려와서는 고기와 소금을 취한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은 소나무가 무성한 변산을 뒤로 하고, 어염(魚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갯벌을 앞으로 하는 자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자기(瓷器), 소금, 조기와 같은 물산이 뚜렷하게 발전하였다.

곰소만은 전라북도 부안군과 고창군 사이를 좁고 길게 들어간 모양으로 형성되었다. 곰소(熊淵)는 지형이 곰과 같고 그 앞에 깊은 소(沼)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해안 최대 어장인 칠산 어장을 배후에 두고 있는 곰소만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넓은 간석지가 발달하여 다양한 어류들의 주요 산란지 및 서식지 역할을 해 왔으며 소금의 주 생산지이자 젓갈 산지로서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제염지(製鹽地)로서의 부안]

곰소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인근에 산업 단지나 공장이 없고, 갯벌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영양분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해 왔다. 곰소만 지역은 조선 시대에도 이곳에서 어획된 어물을 이용해 굴비, 젓갈 등 염건품(鹽乾品) 및 염신품(鹽辛品) 같은 수산 가공 식품이 발달하였다.

일제 강점기 천일염 생산 단지가 대거 조성되기 전부터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서는 해안 곳곳에서 소금을 만들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고문헌에서 염소(鹽所)[소금 만드는 곳], 염창(鹽倉)[소금 보관 창고], 염분(鹽盆)[소금가마 또는 소금 만드는 곳] 등의 소금 만들기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부안군 제염지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부안현 서쪽에 염소와 염창이 있고, 공사 염간(鹽干)이 모두 1백 13명이다. 봄가을에 바치는 소금이 1천 1백 27석 남짓하다.” 부안현 서쪽은 지금의 부안군 서해안 쪽을 말하는데, 이곳에 소금 만드는 곳과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는 뜻이다. 염간은 소금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한다. 1917년에 측량된 부안 지도에는 총 9곳의 염전이 표시되어 있으며, 곰소만 제염지는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보안면 신복리, 보안면 유천리 등에 있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염소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소금은 생산 방법에 따라 자염과 천일염으로 나뉜다. 자염은 바닷물을 농축시켜 이것을 가마솥에서 끓여 내는 방법으로 이를 전오염(煎熬鹽) 또는 자염 제염법(煮鹽製鹽法)이라고도 한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 들여 햇볕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다. 한국에서 천일염 제염의 시초는 1907년 인천 주안포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정부는 단계적으로 천일염 염전을 축조해 나갔다. 제1기에서 제3기까지 축조된 염전지는 경기도와 평안남북도이다. 이 시기까지 전라북도 부안은 천일염보다 자염 생산이 더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에 발행한 『부안군지』에는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구진 마을에서는 천일염을 생산하고, 나머지 지역은 토염(土鹽)을 생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염의 제염 과정]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구진 마을에서는 자염을 활염 또는 육염(陸鹽)이라고 하며, 활염은 화염(火鹽)이 변형된 말이다. 육염을 만드는 과정은 크게 두 단계이다. 첫 단계는 갯벌에서 바닷물을 농축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농축시킨 함수(鹹水)를 ‘소금물’이라고 한다. 소금물을 만드는 곳을 ‘섯등’이라고 한다. 다음 단계는 소금물을 운반하여 가마솥에서 끓여서 수분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든다. 이곳을 ‘벌막’ 또는 ‘벌자리’라고 한다. 구진마을에는 벌막이 2곳, 섯등이 10개 정도 있었다. 자염의 제조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섯등 만들기

바닷물을 퍼붓기 위해 갯벌 작은 고랑[새끼 고랑]에 섯등을 만든다. 고랑 옆 두둑이 된 부분에 원형으로 깊이 2m 이상의 구덩이를 가래로 파 내려간다. 이때 가래 자루를 잡는 사람을 ‘짐쟁이’라고 한다. 섯등 테두리 4곳에는 염토(鹽土)를 밀어 넣을 수 있는 문을 만들고, 섯등 바닥 한쪽에 깊이 3m 정도의 홈을 파 나무판자로 ‘井’ 모양의 염수통을 만든다. 이곳에 소금물이 모인다.

2. 갯벌 갈이와 염토 만들기

두 마리 소[牛]에 써레를 걸고 섯등테에서 갯벌을 가는데 이를 흙갈이터라고 한다. 갯벌의 써레질은 뻘[개흙]을 갈아 말려서 염분을 농축시키는 작업이다. 조금 때에는 섯등과 흙갈이터에 바닷물이 잠기지 않고 드러나기 때문에 써레질은 조금 때에 한다. 조금은 한 달에 두 번 음력으로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에 있으므로 조금 이틀 전인 열두물[음력 6일]부터 아친조금[음력 7일], 한조금[음력 8일], 무쉬[음력 9일]까지 나흘간 써레질을 하여 개흙을 말린다. 4~5일간 써레질을 하여 염분이 농축된 개흙은 염토가 된다.

3. 섯등에 염토 채우기

소에 나래를 걸고 염토를 섯등으로 운반하는데, 섯등에 염토를 채울 때는 하나의 섯등에 8마리의 소가 필요하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구진 마을에 10개 정도의 섯등이 있었으니 80마리 정도의 소가 필요했던 셈이다. 염토를 채울 때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소들을 가져다 썼다. 한 번 조금으로 섯등에 염토를 전부 채울 수가 없다. 다음 조금 때에 갯벌을 갈아 거듭해서 염토를 채운다. 연이어 염토를 채우는 작업을 ‘중배기’라고 한다. 이중으로[연이어] 곱배기 작업을 한다는 뜻이다. 다음 조금까지 섯등은 갯벌에서 사리를 맞이한다. 사리 때의 만조(滿潮) 시는 갯벌에 바닷물 수위가 120㎝~130㎝ 정도 되므로, 이때는 작업을 할 수 없다. 섯등에 바닷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섯등 주변에 둑을 쌓아 올린다.

4. 소금물 만들기

조금 때에 섯등에 염토를 메우고 난 후, 두물날[두마, 음력 열하루와 스무엿새]과 세물날[서마, 음력 열이틀과 스무이레]에는 새끼 고랑까지 바닷물이 온다. 새끼 고랑을 갯벌로 막아 물 저장고를 만든다. 나무판자로 ‘ㄷ’자 모양의 홈을 만들어 이 물 저장고와 섯등을 연결하여 세워 건다. 이를 ‘호모대’라고 한다. 호모대는 홈대, 즉 홈통을 뜻한다. 물 저장고의 바닷물을 섯등의 염토 위에 바닷물이 20㎝~30㎝ 고일 때까지 쪽바가지[쪽박]로 호모대에 퍼붓는다. 바닷물이 농축되어 염수통의 소금물의 염도가 10도~12도가 되도록 한다. 염수통에 모인 소금물을 다시 섯등의 염토에 퍼부어서 염도를 높인다. 염도 12도의 소금물을 만드는 데 보통 일주일이 걸린다. 염수통의 소금물은 ‘뽀메’라고 하는 염도계로 측정한다. 프랑스 화학자 ‘보메(A. Baumé)[1728~1804]'가 고안한 액체의 비중을 측정하는 비중계다.

5. 소금물 운반

염수통에 모아진 소금물을 물통에 담아 ‘무지게[물지게]’에 지고 벌막으로 운반한다. 물통은 나무쪽을 이어 대나무로 둘러 만든 것으로 ‘스기목[삼나무]’으로 짜서 만들기도 하였다. 삼나무는 물을 덜 먹고 가볍다. 삼나무는 한반도에는 없는 수목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말에 배를 만들기 위해 일본인들이 심었다. 소금물을 운반하는 물통의 형태는 밑 부분을 넓게 만들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구진 마을의 갯벌은 점도(粘度)가 강하므로 소금물을 운반하다가 쉽게 엎질러지지 않도록 밑 부분을 넓게 하여 안정성을 취한 것이다. 소금물을 운반하는 사람을 ‘지게꾼’이라고 불렀는데, 지게꾼 삯은 일반 운반보다 20% 정도 더 많이 쳐 주었다.

6. 벌막에서 소금 굽기

소금물을 벌막으로 운반하여 가마솥에서 졸여서 소금을 만든다. 벌막은 소나무로 서까래를 걸고 짚으로 덮어 원뿔형으로 만든다. 소금을 구울 때 생기는 수증기가 나갈 수 있도록 천장은 터놓으나 비가 새지 않도록 꼭대기에 고깔 모양의 ‘갓머리’를 씌운다. 벌막의 넓이는 보통 99.17㎡정도다. 벌막에서는 3명~4명의 인부가 작업을 한다. 그중 한 명은 가마솥의 불을 지피는 사람이다. 이를 ‘부쟁이’라고 부른다. ‘불쟁이’에서 ‘ㄹ’이 탈락한 것이다. 가마솥에서 소금의 염도가 25도가 되면 물 위에 하얗게 기름처럼 뜨는 것이 생긴다. 이것을 ‘소금 꽃이 핀다.’고 한다. 이것은 천일염도 마찬가지다. 50통의 소금물의 경우 가마솥에 주야로 이틀간 불을 지피면 소금이 구워진다. 소금을 굽기 위해서는 땔감의 조달이 중요한 문제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구진 마을은 주변의 산에서 땔감을 구할 수 있었다. 가마솥이 완전히 식으면 당그레[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아 간수를 뺀다. 간수를 빼면 육염 만들기는 완성된다.

[천일염의 제염 과정]

곰소 염전 천일염은 바닷물[저수지]-제1 증발지-제2 증발지-결정지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제1 증발지를 지역어로 ‘난치’ 제2 증발지는 ‘느티’라고 한다. 염도 약 1도~2도의 바닷물을 염전의 증발지에서 단계적으로 증발시켜 결정지에서 25도가 되면 소금을 낸다. 염전은 전부 14칸이다. 제1 증발지가 6칸, 제2 증발지가 4칸, 결정지가 4칸이다. 제1 증발지에서는 6도~7도, 제2 증발지에서는 22도까지 염도를 높인다. 결정지는 소금을 결정시키는 곳 2단과 소금을 내는 곳 2단으로 되어 있다. 염도 25도가 되면 소금이 된다.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바닷물이 소금이 되기까지는 14일~15일 걸린다. 남선염업의 염전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회사에서 전부 제공해 주었다. 회사에 목수간이 있어서 도구의 수리를 담당했다. 목수간에는 2명의 목수가 있었다. 반장이 염도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뽀메’는 육염 만들 때 사용하는 것과 같다. 염전에서 사용하는 시설과 도구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1. 해조

증발시킨 바닷물을 비가 올 때 임시 보관하는 저장고다. 바닥은 윗부분이 넓고 밑 부분이 조금 좁다. 예전에는 제2 증발지에 4개, 결정지에 4개 있었으나 지금은 결정지에만 있다.

2. 결정지

결정지의 바닥 2칸은 타일 왼쪽이고 나머지 오른쪽 2칸에는 옹기 조각을 깔았다. 결정지에 옹기 조각을 깔 때 옹기를 깨어 그 조각을 잘 맞추어 깔았다. 이 일은 여자들이 하였다.

3. 염전 창고

소금 가마니를 보관하는 곳이다. 벽은 비스듬하게 밑이 넓고 윗부분이 좁다. 벽이 직각일 경우 소금 가마니의 무게로 벽이 무너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4. 수레채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수레채[수차]가 해조마다 있었다. 수차 하나 값은 쌀 세 가마니였다. 수차를 만드는 일은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회사에 있던 목수는 수차를 수리는 하였으나 만들지는 못했다.

5. 대패

결정지에서 소금을 낼 때 소금을 밀어서 모으거나, 증발지의 물을 빼고 건조시킬 때 사용한다. 염판 중심부는 판자 부분이 긴 대패를, 염판 주변은 그보다 작은 것을 사용한다. 증발지 바닥의 물을 비우고 건조시키는 것을 ‘감난다’라고 한다.

6. 롤러, 곰베

롤러는 증발지 바닥의 흙을 다질 때 사용한다. 제2 증발지에서 주로 사용한다. 증발지의 물을 빼고 대패로 밀어 감내고 나서, 롤러를 끌면서 염판을 다진다. 곰베는 소금꽃이 뜨는 것을 가라앉힐 때 사용한다.

7. 각삽, 염삽, 양삽

각삽은 결정지에서 소금을 낼 때 대패로 소금을 밀어 모으고 각삽으로 퍼서 운반한다. 각삽은 소금을 가마니에 담을 때도 사용한다. 염삽은 증발지 주변의 흙을 깎는 데 사용하며 각삽보다 삽날의 크기가 작다. 양삽은 흙을 퍼서 담을 때 사용한다.

8. 지게, 바작, 빗자루, 물코막이

지게는 증발지와 배수지의 흙을 나를 때 사용한다. 바작은 싸리로 만든 것으로 흙을 운반할 때 지게에 얹어 사용한다. 빗자루는 염판 바닥의 때를 벗길 때 사용한다. 물코막이는 흙을 헝겊으로 싸서 만든 것이다.

9. 갈쿠리[갈고리]

갈쿠리는 작은 갈쿠리와 긴 갈쿠리가 있다. 작은 갈쿠리는 소금 가마니를 옮길 때 사용한다. 긴 갈쿠리는 물코를 틀 때 사용한다.

10. 깃발

식사 신호를 보내는 깃발로 맑은 날에는 흰 깃발을, 흐린 날에는 검은 깃발을 사용했고, 간식 깃발도 따로 있었다.

[남선염업의 염부 이몽룡]

남선염업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에 있는 염전으로 1946년 남선염업주식회사로 출발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원래 일제 강점기 말 일본인들이 건설하려던 염전이었는데 패망과 함께 일본이 물러가자 남선염업이 공사를 완료하여 염전을 일구었다. 당시 남선염업에서 관리하는 염전은 81정이었다. 제염 작업의 기본 규모는 5정[약 4만 9587㎡]이다. 이것을 ‘1부’라고 하였고 5명이 작업을 하였다.

1부에서의 염전 작업자[염부(鹽夫)]의 구성은 반장, 보조 1명, 특임시 1명, 임시 1명으로 구성된다. ‘반장’은 결정지에서 소금을 내는 작업을 한다. ‘보조’와 ‘특임시’는 주로 증발지의 물 내리는 일을 하고, ‘임시’는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염부장’은 2부를 관리하였다. 회사에서 쌀을 염부장에게 주면 염부장이 식사와 간식을 관리하였다. 농사일에 새참을 먹는 것과 같이 염전에서의 일도 육체노동이 많으므로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간식을 먹었다. 간식은 쌀밥이었다. 월급은 당시 쌀 또는 돈으로 받았는데 임시직일 경우 한 달 월급을 쌀로 받으면 3식구~4식구가 먹고 살았다.

이몽룡[1938년생]은 29세에 남선염업의 염부가 되어 40년 이상을 이곳에서 일했다. 전라북도 정읍이 고향인 그는 정읍에서 결혼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던 중 좀 더 넉넉하게 살아보기 위해 부안의 풍진마을로 이주하여 감나무 과수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가뭄으로 소출은 적고, 아버지와 동생의 수술비까지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남선염업에 취직을 했다. 당시 남선염업에는 120여 명의 직원들이 일했다. 염부들은 염판에 나와 소금 만드는 일에 주력했고, 포장을 전문으로 하는 포장반, 야간 감시 등도 있었다. 현장 사무실과 협력 업무를 보는 사무실이 각각 있었다. 또 목수간에서 일하는 목수들은 소금창고나 도로꼬[소레] 등의 장비를 보수하고, 돈배[소금 걷는 나무배]나 ‘육구’를 빼고 막는 ‘육구[호]’ 망치를 만들었다. 당시 남선염업에는 직원들을 위한 사택이 많았다. 사택 수리 역시 목수들이 담당했다.

당시 염전은 가난한 사람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던 곳이다. 염전에 들어가면 웬만한 식구는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임시직[3개월]의 경우에도 쌀 20㎏과 370원[일공, 지금의 3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았다. 이 씨는 3개월 후부터 450원을 받았고, 쌀은 보름마다 지급 받았다. 당시 쌀에 보리와 잡곡을 넣어 지어 먹던 때 남선염업의 염부는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남선염업은 1996년과 1997년 염전 면적 일부를 폐전하여 50%가량 축소했다. 1990년대 후반 소금 수입이 자유화 되면서 국내 천일염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데 따른 정부의 조치였다. 회사 사정이 어려웠던 남선염업은 폐전 이후 염전을 직영에서 임대로 전환시켰다. 임차 초기에는 수입이 변변치 않았다. 소금 가격이 저렴하고 생산량도 적었기 때문이다. 또 전에는 1부에서 5명 많게는 8명까지 일했으나 임차로 전환한 뒤에는 두 사람이 한 조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곰소 염전의 소금은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이는 위생 관리에 만전을 기하기 때문이다. 소금을 만들다 보면 ‘고집 간수’라는 게 나온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얻고 난 뒤 남은 찌꺼기이다. 이 간수를 제때 폐기해야만 품질과 맛이 좋은 소금을 만들 수 있다. 간수를 철저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소금에서 쓴맛이 난다. 염부들은 위생적인 식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자염에서 천일염에 이르기까지 부안 곰소의 소금꽃은 지지 않고 쉼 없이 피었다. 바다와 바람과 햇빛이 빚어낸 하늘이 준 소금은 염부들의 수천, 수만 번의 손길과 땀방울이 아니고서는 피워낼 수 없는 꽃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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