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18
한자 傳統養蠶農業-扶安遊儒-
영어공식명칭 Buan Yuyu Village’s People Who Carry on the Traditional Sericultur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식

[정의]

2017년에 ‘부안 유유동 양잠 농업 시스템’ 명칭으로 국가 중요 농업 유산 제8호로 지정된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유유동 양잠 농업 마을.

[국가 중요 농업 유산으로 지정된 부안 유유동 양잠 마을]

부안 유유동 마을은 변산반도 내륙을 횡단하는 유일한 도로인 지방도 제736호선이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2017년 기준으로 54세대 가운데 47농가가 직간접적으로 양잠 농업에 임하고 있으며, 직접 누에를 사육하는 농가가 2020년 기준 17농가이다. 마을 전체의 뽕나무밭은 19.7㏊, 산뽕 군락지 4㏊, 야생 뽕나무 군락지 0.3㏊로 주변에 온통 뽕나무밭이 차지하고 있다. 유유동은 산골짜기 마을로 대부분 밭으로 형성된 지형이고, 토양에는 돌이 많은데다가, 토질도 매우 척박해서 농사 짓기가 매우 불리한 곳이다.

반면에 국립 공원인 변산반도가 청정 지역임은 물론 여러 지형상 양잠 농업에는 천혜의 지역임이 일찍부터 경험적으로 검증되었다. 따라서 주민들도 최소 150여 년 전부터 토질의 취약함을 양잠업으로 극복하면서, 비록 고단한 삶이었지만 양잠을 숙명으로 살아왔다.

부안 유유동 양잠 농업 은 2017년 12월에 ‘부안 유유동 양잠 농업 시스템’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중요 농업 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유유동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통 방식의 양잠 농업으로서 뽕나무 재배에서 누에 사육에 이르는 전 과정이 일괄 시스템으로 전승되고 있다. 부안 유유동 마을은 조선 시대부터 부안현(扶安縣)[현 전라북도 부안군의 조선 시대 이름]의 토산품이 뽕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성이 깊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양잠 농업이 유지·보존되고 있다는 점과 누에 생육에 가장 중요한 온도와 통풍 관리에 적합한 천혜의 지리적 여건과 함께 여전히 전통 잠실(蠶室)이 보전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국가 중요 농업 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부안 유유동 마을에 보존된 양잠 농업의 전통성]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유유동 마을의 양잠 전통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이 산뽕나무, 뽕나무 가로수, 전통식 잠실이다. 부안 유유동 일대에는 산뽕나무 군락지가 여러 곳에 존재한다. 부안 유유동 마을의 양잠은 조선 시대부터 이어 온 전통적인 양잠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가 근래까지도 산뽕나무를 최대한 이용하여 누에를 사육하였다는 점이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되지만 그동안 부안 유유동 일대의 양잠은 생계 자립형 가내 수공업식 양잠이 이루어져 왔다. 전통적인 양잠 산업은 야생 산뽕나무를 활용하거나, 전답(田畓)의 경계 또는 산과 밭의 경계 부근에 식재된 산뽕나무를 이용하여 누에를 사육하였다. 그런 점에서 부안 유유동에 산재한 산뽕나무 군락지가 유유 마을 양잠의 전통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부안 유유동 마을의 양잠 농업 전통은 현재도 8개가 보존되어 있는 전통 잠실이 말해 주고 있다. 100년 이상 된 전통적인 잠실의 형태가 현재 유유동에 존재하고 있으며 잠실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변산반도에 위치한 유유동은 서해안 해풍을 직접 받는 산골 지역으로 흙과 돌을 이용한 토담집 형태의 잠실이 최적의 누에 사육 재배사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현재 유지되고 있는 전통 잠실은 건축학적인 변천 과정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초기에는 볏짚이나 갈대 등을 활용한 초가의 형태에서 슬레이트(slate) 혹은 기와지붕으로 개량되었으며, 돌과 흙을 재료로 한 토벽은 시멘트로 보수된 곳도 있다. 토담 벽면의 외부 표면이 시간적 혹은 재료의 변화에 따라 보수 개량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안 유유동 주민들이 말하는 누에와의 한평생]

부안 유유동 주민들은 누구나 누에치기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한 말씀씩 전한다. 1960년대부터 양잠이 본격화되었다. 거의 모든 농가에서 봄누에를 키웠으며, 자투리땅에는 뽕나무를 심었고, 야산에 산재된 산뽕나무에서 뽕잎을 수확하였다. 초여름이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유일한 간식이었으며, 잘 익은 검정 오디가 맛으로 그만이었다. 농약과 비료가 부족한 가난한 시절에는 누에 농사가 오히려 최적화되었는데, 농약의 피해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절에 다른 작물에 해충제를 뿌리다가 누에가 폐사한 경험도 있다. 그때는 정부에서 전량 수매하던 시절이었다. 매년 6월에 누에고치 수매가 끝나면 농가들은 곧바로 담배 농사에 매달려야 했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유유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구술 조사를 시행했다. 손평국[82세, 1939년생] 노인 회장, 이승헌[76세, 1945년생]과 최복원[67세, 1954년생] 부부가 그들이다. 주민들에게 속칭 ‘누에 박사’로 알려진 분이 손평국 노인 회장이다. 그는 유유 마을 양잠이 적어도 150년은 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역사에 대한 나름의 논리와 시간 계산을 마친 주장이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자료를 둔다던지 그런 것은 아녀. 내가 겪은 사실이 근거라면 근거여. 첫째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이 한 77~8년 전쯤일 거여. 여기는 도로를 따라 집들이 있어서 마을 길이가 한 2㎞가 되는데, 그 길 좌우로 온통 뽕나무 가로수였어. 내가 올라 다니면서 오디를 따먹고 하던 가로수가 그만큼 클라면 못되어도 4~50년은 걸리지 않겠는가. 그놈을 합치면 벌써 120년이 넘잖여. 거기다가 동네 사람들이 가로수를 뽕나무로 심을 정도면 누에에 대한 그만한 경험이 쌓여 있을 것 아닌가. 또 누에에서 실을 뽑아서 명주 베를 짜는 것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고. 그런 직조 기술까지 다 익힐라면 3~40년은 걸렸겠지. 그렇게 따지면 150년 주장이 결코 헛된 말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지.”[손평국]

유유동의 산뽕나무 군락지도 그렇지만 도로 양쪽으로 뽕나무 가로수를 심을 정도면 양잠 농업에 대한 선조들의 의식 전환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도 지어보고 저것도 지어보니까 이 토질에는 별로 맞는 것이 없어. 그래서 누에를 키워보니까 이 지역 생산물로는 괜찮허다 그거지. 그러니까 본인들이 터득을 한 것이지.”라는 식의 재발견인 셈이다.

이제 누에 농사가 무엇인지, 어떤 단계로 누에를 키우는지, 다 키운 뒤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 명주실까지 이르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오령칠일(五齡七日)’이 누에의 일생이었다.

“알에서 막 깨어난 것을 ‘일령’이라고 혀. 일령은 삼일을 먹고 1.5일 잠을 자. 그리갖고 깨어나면 이령이 되지. 사흘 동안 먹고 또 자. 그때는 이틀을 자. 그게 삼령이고. 깨어나면 인자 나흘을 먹고 또 자. 그게 사령, 그리고 또 이틀을 자. 그게 막잠여. 그러면 오령이 되지. 오령에서부터 7일까지 멕여야 누에로 생명을 끝내고 고치를 짓는 거여. 근디 이때부터가 중요허지. 오령에서 깨어나서 먹는 것이 오령 전까지 먹은 것보다 배는 더 먹어. 그때는 뽕잎 먹는 소리가 비오는 소리하고 똑같당게. 근디 신기한 것은 7일 동안 먹다가 딱 그쳐. 그리고 누에가 똥으로 다 배설하고, 일생에 단 한 번 오줌도 이때 싸. 그렇게 배설로 속을 다 비우면 누에 색깔이 노로스롬하게 변해. 노란혀. 뱃속이 다 보여, 투명하게. 그걸 보고 누에가 다 익었다고 그려. 그러면 누에가 머리를 딱 쳐들지. 그것을 ‘해바라기’라고 하는디, 그때가 집 지을 준비가 완성되었다는 거여. 야들은 집을 짓는 것이 최종 목적이랑게.”[손평국]

봄누에[춘잠]의 경우 5월 22일 지나서 시작한다. 이때면 잠종장에서 누에알을 깐 애기 누에를 분양해 준다. 6월 중순까지 키운다. 애기 누에에서 5령7일까지, 즉 해바라기까지 약 20일간 키우는 것이다. 가을누에[추잠]는 처서[8월 24일]에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은 누에고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즉 명주실을 생산하기 위해서 누에를 치는 게 아니고 약용을 목적으로 생산을 한다. 그러니까 5령7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3일간만 먹이고 생누에로 냉동을 시키든지 삶아서 건조기[열풍 건조]로 말리든지, 용도에 따라 가공한다. 이후에는 어떤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7일간 먹고 익은누에가 되면 이제 ‘누에올리기’를 혀. 뭐냐면 누에가 고치 집을 지을 곳으로 옮겨주는 거여. 그거 보고 회전족이라고 허는디 뭐냐면 나무 종이 상자로 칸칸이 돼 있어. 쉽게 말하면 누에 아파트여. 한 칸에 한 마리씩 올려 주면 누에가 고치를 치기 시작혀. 누에 갸들이 입으로 실을 풀어내는 것이, 가장 많이 풀어내면 천오백 미터를 풀어내. 누에는 위 있는 주변에 실보따리가 들어 있어. 신통방통한 일이지. 긍게 누에는 하늘이 준 것이라고 혀서 천충(天蟲)이라고 허지.”[손평국]

누에가 ‘막잠’을 자고 7일간 먹은 뒤 ‘익은누에’가 되고, 각자 자기 집으로 올라간 누에는 실을 뽑아 ‘고치집’을 짓기 시작한다. 누에고치가 완성되면 솥에다 넣고 찐다. 찐 고치에서 실을 뽑아낸다. 이때 동원되는 도구가 ‘물레’다. 그 실이 다 뽑아 나올 때까지 어린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킨다.

“그렇게 실을 잡아 댕기다 보면 누에고치 실이 다 풀어지고 뻔데기가 보여. 그러면은 우리 아이들은 실이 다 빠져야 뻔데기를 먹을 수 있으니까 눈이 떨어져라 그 놈만 쳐다보고 있는 거여. 그렇게 눈 빠지게 기다리다 먹는 것이 뻔데기라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지.”[이승헌]

보통 ‘애기누에’부터 2령까지는 방에서 키웠다. 온도와 습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방에서 키운다고 ‘방건치기’라고 한다. 두잠 잘 때까지 최소 일주일 걸린다. 어린누에 키우는 곳을 요즘은 현대화시키고 ‘치잠실’이라고 한다. 두잠을 잔 누에는 이제 ‘잠실’로 옮겨서 키운다.

누에는 뽕나무 잎으로 키운다. 뽕잎 자체가 섬유질이고, 그걸 먹고 자란 누에가 ‘실샘’에서 섬유로 토해낸 것이 명주실이 된다. 제때 누에 밥을 대주는 일이 가장 큰 일이고, 엄청난 중노동이다. 누에도 사람처럼 하루 세끼를 먹는다. 애기누에 때는 어린잎을 따서 먹이지만 성장한 누에는 뽕나무를 가지 채 베어다 먹여도 공급이 못 따라갈 지경이다.

“누에를 키우는 일을 뽕을 비어서 나르는 일, 그것이 제일 힘들어요. 가을누에 키울 때는 새벽 3시면 일어나야 혀요. 해가 뜨면 건조한 바람이 막 불어. 그럴 때는 아침 9시 되기 전부터 뽕잎이 마르기 시작혀요. 뽕잎이 마르면 버석버석하니까 누에들이 못 먹어요. 그때는 잠을 한숨도 못자요. 3시에 일어나서 누에 밥을 줘요. 밥을 줄라면 3시간 걸려요. 그리고 밥 한 숟가락 떠먹고 뽕을 또 비어 와야 혀요. 낮에 먹을 놈 비여야지. 누에 한 밥 잡히면 뽕을 가져오는 대로 먹어치워요. 그렁게 뽕을 저녁 먹을 놈 비야지, 낼 아침에 먹을 놈 비야지, 낫 하나 들고 죽어라고 비는 거요. 뽕을 가지 채 비어서 짊어지고 나르는 일이 젤로 징그라요.”[최복원]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힘든 노동이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그렇게 살았다. 돈이 귀하던 시절, 명주 베를 짜서 가족들 의복을 만들어 입고, 이불을 만들어 덮었다. 소규모로 양잠을 하던 때라 판로도 없었다. 오직 양식하고 바꿀 생각뿐이다. 옛날에는 방물장수들이 보따리에 여러 물건을 담아서 팔고 다녔다. 그 물건들과 물물교환 하는 게 고작이었다. 1970년대부터 정부에서 국가 시책으로 양잠을 권장했다.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대로 정부에서 수매를 해갔다. 비로소 돈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 돈이 생기자 자식들 교육도 할 수 있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뽕나무를 무상으로 주면서 뽕을 심으라고 해가꼬 많이 심기 시작했어. 정부서 육성 사업으로 하면서 수매를 하기 시작했어. 등수 메겨가꼬. 그때부터 많이 키우기 시작혔지. 70년대는 수출을 헐란게 정부에서 막 장려를 혔지. 70년대에 우리 마을같이 마을 전체가 집단으로 누에를 키우는 디가 없었어. 그래서 농림부 주관으로 우리 마을에서 전국 양잠 대회를 가진 일이 있었지. 자연 부락 한 마을에서 누에 공판장을 이룬 디는 우리 뿐이여. 우리 마을 하나 보고 여기에 누에 공판장이 섰당게. 그때부터 우리 동네를 누에 마을, 누에 마을 혔지.”[손평국]

[부안 유유동 마을의 양잠 농업 현대화]

그럼에도 양잠 사업은 쇠퇴 일로에 놓이게 되었다. 정부에서 수매를 중단했고, 생산자들은 판로를 개척하지 못하였다. 1980년대에는 중국산 생사가, 1990년대부터는 베트남, 캄보디아 산 생사가 저가로 수입되면서 대부분의 농가에서 양잠을 포기하였다. 이에 부안군과 전라북도는 전통 양잠 산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로 오히려 역발상을 하였다. 계기는 2003년에 농촌진흥청과 대한잠사회에서 부안 유유동을 대한민국 3대 청정 지역으로 지정한 것이었으며, 이후 민관학의 긴밀한 연구와 협업 아래 2006년에 당시 지식경제부로부터 ‘부안 누에 특구’ 지정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는 동안 부안 유유동 마을에는 부안참뽕연구소, 전라북도 잠사 곤충 시험장, 누에 곤충 과학관, 탐험관, 체험관, 누에 동산 등 부안 누에 타운이 조성되었다. 이후 부안 유유동 양잠 마을은 2017년 말에 ‘부안 유유동 양잠 농업 시스템’으로 국가 중요 농업 유산에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양잠 산업이 쇠퇴하고 전국 대부분의 농촌에서 양잠을 포기한 상황 속에서 부안 유유동이 전통 양잠을 기반으로 현대화를 꾀하여, 이른바 기능성 양잠으로 양잠 산업의 혁신적 전환을 시도하고, 한국 양잠 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가고 있다. 즉 전통적인 ‘입는 뽕 산업에서 먹는 뽕 산업’으로 질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안 유유동 양잠 농업 이 산업화를 시도하면서 전통적인 양잠 방식에서 두 가지가 달라졌다. 하나는 5령7일이 5령3일로 바뀐 것하고, 누에를 하우스에서 키운다는 점이 그것이다. 5령3일로 줄어든 것은 누에에서 더 이상 실을 뽑지 않고 약용으로 전환한 때문이다. 3일간만 먹인 누에를 냉동을 하거나 삶거나 해서 용도에 따라 가공한다. 또 누에를 잠실이 아닌 하우스에서 키우고 있다. 양잠 규모가 커진 탓이고, 온습도 유지 때문이다.

“과거에는 돌담을 쳤거든. 돌담을 쳐가지고 잠실을 만들어서 했는디 지금은 하우스가 키워. 신형 잠실이지. 옛날에는 잠실 바닥에서 키웠는디 다 노인네들인디 허리 아파서 어떻게 할 거요. 하우스에서는 사람 높이로 층을 만들어서 다루기가 좀 좋지. 뽕을 먹일 때도 국상대차가 있어. 거기다 뽕을 실코 궁글리고 다니면서. 그래야 많이 키우지. 하우스 아니면 많이 키우들 못혀. 지금은 박사님들이 다 교육을 시켜줘. 당뇨 환자들이 먹을 거면 5령3일만 키우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라고 하더만. 또 요즘은 누에올리기를 안 하니까 숙잠기에 넣고 4시간을 쪄. 그렇게 찌면 누에에 있는 실샘이 전부 분해가 된다고 혀. 그것이 치매 예방도 되고 암 예방에도 좋다고 그려. 숙잠기에 찐 것이 여러 가지 좋은 성분이 엄청 많아서 이름을 ‘홍잠’이라고 붙였어. 홍삼 하디끼 홍잠이라고 박사들이 붙였어. 다 검증을 한 거지.”[손평국]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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