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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8001277
한자 來蘇寺-古典文學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미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전라북도 부안군 내소사를 배경으로 노래한 한시 작품.

[개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에 소재한 내소사(來蘇寺)는 삼국 시대 백제의 승려 혜구 두타가 창건한 사찰로 애초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이 절에 찾아왔던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유고(旅菴遺稿)』 권4 「변산내소사기」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드러나 있다[부안현 변산(扶安縣卞山) 유사명내소(有寺名來蘇) 사지고적기(寺之古蹟記) 당장 소정방 내진우차(唐將蘇定方來鎭于此) 인이위호(因以爲號)].

[내소사를 노래한 고전문학]

내소사는 오래된 고찰과 명승지로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그 고즈넉함과 아름다움에 반해 시문을 남겼다. 내소사를 노래한 몇몇 작품들을 통해 그 속에 드러난 내소사의 정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고려 전기에 한시 문학을 주도했던 시인으로 평가받는 『동문선』 권12에 실려 있는 정지상(鄭知常)[?~1135]이 칠언 율시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를 남기고 있다.

고경적막영송근(古徑寂寞縈松根)[적막한 옛길엔 솔뿌리 얼기설기]

천근두우료가문(天近斗牛聊可捫)[하늘이 가까워 두우성(斗牛星)은 만질 듯하네]

부운유수객도사(浮雲流水客到寺)[뜬구름 흐르는 물처럼 길손은 절간에 이르고]

홍엽창태승폐문(紅葉蒼苔僧閉門)[붉은 잎 푸른 이끼에 스님은 문을 닫네]

추풍미량취락일(秋風微涼吹落日)[가을바람 산들산들 해질녘에 불어오고]

산월점백제청원(山月漸白啼淸猿)[산 달이 차츰 밝아오니 잔나비 맑은 울음소리 들린다]

기재방미일로납(奇哉厖眉一老衲)[기이하도다, 저 긴 눈썹 늙은 스님]

장년불몽인한훤(長年不夢人閒喧)[한평생 속세의 시끄러움 꿈조차 안 꾸었네]

-「제변산소래사」, 『동문선』 권12.

정지상의 시 속에서 내소사는 북두칠성과 견우성이 잡힐 듯 가까이 있는 곳, 가을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오고 달빛 속에 잔나비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속세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시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곳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 내소사에 오게 되면 정신과 기운이 맑고 상쾌해져 속세에서 탐욕으로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자들도 어느새 깨어나게[來此登臨 則神淸氣爽 火宅中貪嗔煩惱之爲沉疴者 不覺蘓醒]”[『여암유고』 권4, 「변산내소사기」] 되는 장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고려 후기 학자인 이곡(李穀)[1298~1351]의 「변산의 여러 암자를 돌아본 뒤에 소래루 위의 시에 차운하고 세월을 기록하다[遊邊山諸菴 次蘇來樓上詩韻以記歲月云]」라는 시이다. 이곡은 변산의 고절(高絶)함을 듣고 여러 암자를 두루 돌아보다가 내소사에 이르는데, 화자는 이곳 내소사에 평생의 거처를 마련하고픈 곳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시이다.

고절증문해안산(高絶曾聞海岸山)[해안의 산이 고절하다 일찍이 들었기에]

투한득득자등반(偸閑得得恣登攀)[틈을 내어 마음먹고 실컷 등반을 하였네]

인종천강제천척(人從天降梯千尺)[사람은 하늘로부터 천 척의 사다리를 내려오고]

승여운분옥반간(僧與雲分屋半間)[승려는 구름과 더불어 반 칸의 집을 나누었네]

선적고지유견박(禪寂固知猶見縛)[참선도 속박이 되는 줄을 본디 아는 터에]

세연나득감상관(世緣那得敢相關)[세상 인연이 어떻게 감히 걸리게 할 수 있으리오]

취미하일용오주(翠微何日容吾住)[푸른 산에 어느 날에나 나의 거처 마련하여]

죽장망혜일왕환(竹杖芒鞋日往還)[대지팡이에 짚신 신고 날마다 오고갈는지]

-「변산의 여러 암자를 돌아본 뒤에 소래루 위의 시에 차운하고 세월을 기록하다」, 『가정집』 권20.

다음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내소사」라는 시이다. 이 시는 천 척이나 되는 고송(古松)과 달 하나 걸려 있는 산사의 고즈넉함을 배경으로 학의 모습이 여유롭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여유로움은 내소사의 고절함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범궁의산외(梵宮倚山隈)[절간은 산모퉁이를 의지해 있고]

석양누각개(夕陽樓閣開)[석양 속에서 누각은 열려 있네]

승심천맥거(僧尋泉脈去)[스님은 샘 줄기 찾아 떠났고]

학피명연회(鶴避茗煙廻)[학은 차 끓이는 연기 피하여 거닌다]

사고송천척(寺古松千尺)[절이 오래되어 소나무가 천 척이나 되고]

산심월일퇴(山深月一堆)[산은 깊으니 오직 달 하나만 있네]

무인감문화(無人堪問話)[묻고 이야기할 사람 없으니]

정반독배회(庭畔獨徘徊)[뜰 가에서 홀로 배회할 뿐]

-「내소사」, 『매월당집』 권11.

조선 중기의 문신 기준(奇遵)[1492~1521]의 『덕양유고』 권1에 「소래사」 시가 있다.

창애절로만림근(蒼崖絶路挽林根)[길 끊긴 푸른 벼랑을 나무뿌리 잡고 올라]

고탑잔서수자문(古塔殘書手自捫)[옛 탑에 남은 글씨 손으로 어루만지네]

차일상회내야사(此日傷懷來野寺)[이날 슬픈 맘으로 들 절간 찾아왔는데]

하인유상도송문(何人遊賞到松門)[어떤 사람이 유람 차 송문에 이르렀나]

운심노수소고학(雲深老樹巢孤鶴)[구름 깊은 노목에 외로운 학 둥지 틀고]

일락군봉향단원(日落群峯響斷猿)[해 지는 뭇 봉우리에선 애끓는 원숭이 우네]

조수부지인사변(潮水不知人事變)[조수는 인사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조조공향해관훤(朝朝空向海關喧)[아침마다 부질없이 어촌 향해 시끄럽게 철썩이네]

-「소래사」, 『덕양유고』 권1.

기준은 신사무옥으로 유배지에서 29세 때 사망한 인물로 직제학과 도승지를 지냈다. 위 시는 당시 무장 현감으로 있던 큰형 기형(奇逈)을 만나고 변산에 들러 남긴 시라고 한다. 기준은 형 기진(奇進)의 소래사 시를 차운한 「차소래사운(次蘇來寺韻)」[『덕양유고』 권1]이란 시도 남겼다. 두 시 모두 내소사에는 자연의 소리만이 들리고, 세속의 시끄러운 소리는 모두 멀리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해산초체접천근(海山迢遞接天根)[해산이 아득히 하늘 끝에 닿았으니]

절등창태수기문(絶磴蒼苔手幾捫)[가파른 돌길, 푸른 이끼를 몇 번이나 만졌던가]

야객권투한장사(野客倦投寒嶂寺)[들 나그네 피곤하여 차가운 산봉우리 절에 투숙하니]

백운공쇄벽라문(白雲空鎖碧蘿門)[흰 구름만 부질없이 푸른 덩굴 문에 가득 차 있네]

송변냉영추소학(松邊冷影秋霄鶴)[소나무의 찬 그림자는 가을 하늘의 학이고]

월하청음효령원(月下淸音曉嶺猿)[달 아래 맑은소리는 새벽 산마루의 원숭이라]

일납고승방장주(一衲孤僧方丈住)[방장에 거주하는 외로운 스님 한 분]

추미응염속인훤(皺眉應厭俗人喧)[눈썹 찌푸림은 아마 속인의 떠들썩함 싫어해서리]

- 「차소래사운」, 『덕양유고』 권1.

그 외에 많은 문인들이 내소사를 노래하고 있다. 전라도사와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김제민(金齊閔)[1527~1599]은 『오봉집』 권1에 내소사 관련 시를 여러 편 남기고 있다. 「소래사 야우문녹명(蘇來寺 夜雨聞鹿鳴)」, 「제소래사(題蘇來寺)」, 「소래사 제희장노벽상(蘇來寺 題煕長老壁上)」, 「소래사 견신백록효정지상체 인용효기체 이증덕희장노(蘇來寺 見辛白麓效鄭知常體 因用效其體 以贈德煕長老)」 등이 그것이다. 또한 월사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부안(扶安)으로 부임하는 심덕현(沈德顯)을 보내며 지은 ‘감구유(感舊遊)’ 시에 대한 서」에 덧붙여진 시를 보면, “소래사는 퇴락했어도 유숙할 만하다[蘇來寺廢猶堪宿]”[『월사집』 권39]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 한성부 부윤을 지냈던 권시(權諰)[1604~1672]는 『탄옹집』 권1에 「소래사 증변성징(蘇來寺 贈邊聖徵)」 시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수촌 임방(任埅)[1640~1724]의 내소사 시 「여순상한공여윤 성우 유변산 차내소사시동유제공운(與巡相韓公汝允 聖佑 遊邊山 次來蘇寺示同遊諸公韻)」[『수촌집』 권4] 등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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