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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646
한자 田愚
영어공식명칭 Jeon U
이칭/별칭 전경륜(田慶倫),전경길(田慶佶),자명(子明),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고옹(蠱翁),양하왕인(陽下尫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1년연표보기 - 전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 전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41년 - 전우 추모 ‘전우 유허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74년 9월 27일 - 간재 선생 유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지정
출생지 전우 출생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수학|강학지 전우 강학지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지도보기
묘소|단소 전우 묘소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산3
사당|배향지 계양사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양지길 12[계화리 69]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의산사 - 경상남도 의령군
사당|배향지 용암사[현곡정사]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주곡1길 68-34[주곡리 333]
사당|배향지 덕성서원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도담1길 3-4[세종리 734-20]
사당|배향지 전우 유허비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상왕등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간재 선생 유지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로 569[계화리 8]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담양(潭陽)

[정의]

근대 부안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전우(田愚)[1841~1922]의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고옹(蠱翁)·양하왕인(陽下尫人)이다. 초명은 전경륜(田慶倫) 또는 전경길(田慶佶)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전재성(田在聖)이고, 어머니는 남원 양씨이다. 부인은 박효근(朴孝根)의 딸 밀양 박씨이다.

[활동 사항]

전우는 1841년 전주부 청석리(靑石里)[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에서 전재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 13세에 오서오경(五書五經)을 섭렵하고 1854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다. 1858년 18세에 박효근의 딸 밀양 박씨와 혼인하였다. 1860년 『퇴계집(退溪集)』을 읽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1861년 이름난 유학자 신응조(申應朝)[1804~1899]의 권유로 아산의 신양(新陽)에 살고 있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1811~1876]를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후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를 따라가 살면서 그의 문하에서 20여 년간 학문을 닦으며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1831~1905] 등과 함께 임헌회의 수제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8월 홍순목(洪淳穆)의 천거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강원도도사, 사헌부 장령, 순흥부사,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전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고종 21)에 박영효(朴泳孝) 등이 전우를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개화(開化)를 실현하기 위해 사형에 처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895년 12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자손과 문인(門人)에게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을 착용하고 의리(義理)를 지킬 것을 명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의 소식을 듣고 괴산 화양동에 들어가 머물다가 이듬해 전국을 유람하며 강회를 개최하였다. 1904년(고종 41) 전주, 태인, 순창 등지에서 강회를 열고 1905년 부안에 있는 아들 전경구(田敬九)의 집에 머물며 강학을 이어나갔다. 이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소를 올려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7년(고종 44) 섬으로 들어갈 계획으로 태안(泰安)에 갔는데, 7월 이준(李儁) 열사(烈士)의 소식을 듣고 자손과 문생(門生)에게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천명하였다.

1908년 나라가 극도로 혼란에 빠지자 부안군 북왕등도(北暀嶝島)에 구인암을 세우고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는 뜻으로 학문에 전념하며 자신을 따라 들어온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9년 신시도로 옮겨 안양서실과 완고당을 세웠다. 1910년(순종 4) 8월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비분을 참지 못하고 제자들과 상의해 ‘마침내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에 따라 군산도에서 왕등도로 들어가 의리를 고수하였다. 1911년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1912년 부안군 계화도에 정착한 후 가묘(家廟)의 신주(神主)까지 계화도로 옮겼다. 이후 계화도(界火島)의 지명을 딴 ‘계화재(界火齋)’가 아닌 ‘중화를 잇는다’는 뜻의 ‘계화재(繼華齋)’로 편액한 강사(講舍)를 지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토론하던 강학소로 삼았다. 계화도에서 300여 명의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 활동에 힘쓰다 1922년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전우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오상(五常)의 성(性)을 구비한다는 주장], 즉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이다. 또한 전우는 의리 정신을 숭상하며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발췌하여 『근사록(近思錄)』의 체재를 모방한 『오현수언(五賢粹言)』 편찬에 참여하였다. 특히 전우는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다.

제자로는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김병준(金炳駿)·김택술(金澤述) 등을 비롯하여 3,000여 명을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안자편(顔子篇)』·『연원정종(淵源正宗)』·『간재집(艮齋集)』·『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이 있다. 한편, 글씨를 잘 써서 힘찬 필력으로 골기(骨氣) 있는 강건한 필체를 구사하였으며, 강한 필획에 기개 높은 학자로서의 면모와 문기(文氣)[문장의 기세]가 서려 있다는 평을 받았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산3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 부안군의 계양사(繼陽祠), 전라북도 고창군의 현곡정사 내 용암사(龍巖祠), 전라북도 정읍시의 태산사(台山祠), 경상남도 의령군의 의산사(宜山祠),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의 덕성서원[구 숭덕사] 등에 제향되었다. 1941년에 전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서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상왕등리에 전우 유허비가 세워졌다.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로 569[계화리 8]에 있는 간재 선생 유지(艮齋先生遺址)는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부안군에서는 부안에서 활동한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로 추앙받는 간재 전우의 숭고한 생애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간재전우선생선양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계양사에서 향사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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