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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93
한자 林蘭秀
영어공식명칭 Im Nansu
이칭/별칭 전서공(典書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42년연표보기 - 임난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74년 - 임난수 목호의 난 평정에 참여
몰년 시기/일시 1407년연표보기 - 임난수 사망
출생지 임난수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거주|이주지 임난수 낙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묘소|단소 임난수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합강리
성격 무신
성별
본관 부안(扶安)
대표 관직 공조 전서|우윤

[정의]

고려 말 부안 출신의 무신.

[가계]

임난수(林蘭秀)[1342~1407]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전서공(典書公)’이라고도 불린다. 증조할아버지는 서하공(西河公) 임춘(林椿)이고, 아버지는 순성좌리공신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보안백(保安伯) 임숙(林淑)이며, 어머니는 유씨이다. 제주목사를 지낸 임희재(林熙載)의 동생이다. 부인은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최유(崔濡)의 딸로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다. 첫째는 수사(水使)를 지낸 임모(林摹)이고, 둘째는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를 지낸 임목(林穆)이며, 셋째는 충의교위좌군사직(忠毅校尉左軍司直)에 오른 임서(林叙), 그리고 넷째는 위의장군(威毅將軍)에 오른 임흥(林興)이다.

[활동 사항]

임난수는 1342년(충혜왕 복위 3)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에 공조 전서(工曹), 우윤(右尹)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탐라[제주도] 정벌로 공을 세웠다. 당시 제주도는 몽골인 출신 ‘목호(牧胡)[말을 기르는 몽골인]’들이 고려의 통치에 반발하여 주민 300명을 살해하는 등 목호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고려에서는 1374년(공민왕 23) 8월에 최영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난수를 비장[막료]으로 삼아 전라도 나주포에서 군사 3만 5600명에 병선 300여 척의 대규모 원정군을 출진시켰다.

제주도의 몽골인 목호들의 저항은 완강하여, 치열한 싸움 가운데 임난수 장군이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적의 칼에 오른팔이 잘리고 말았다. 하지만 임난수는 부장에게 떨어진 팔을 주워 자신의 화살통에 집어넣게 한 다음 그대로 싸움을 계속하였다. 이에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적들을 초토화시켰다. 임난수가 자신의 팔을 자른 적을 잡아 정체를 확인하니, 몽골 병사가 아니라 일본 왜구임이 밝혀졌다. 당시 제주도에는 몽골인의 사주를 받은 많은 왜구들이 용병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임난수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요동 정벌에 나서는 등 교류가 있었으나 1388년의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이후 충청도 공주목 삼기촌[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으로 낙향하여 향리에서 1407년(태종 7)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합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18년(태종 18)에 길재(吉再), 정몽주(鄭夢周) 등 18인의 제사 명단에 들었고, 1419년(세종 1)에 고려의 유신으로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임난수의 사당에 ‘임씨가묘(林氏家廟)’의 편액을 내리고,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로 모시도록 명하였으며, 사패지(賜牌地)를 지급하였다. 1682년(숙종 8) 자손이 묘를 보수하였을 때 송시열(宋時烈)이 “몸을 지킴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같다”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실행한 인물로 기록한 신도비문을 지어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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