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601
한자 金光濟
이칭/별칭 金弘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19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6년 7월 1일연표보기 - 김광제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20년 7월 24일연표보기 - 김광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김광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광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19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국채보상운동 주도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광제(金光濟)[1866~1920]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출신으로 애국계몽운동 활동을 한 인물이다.

[관직 생활]

김광제는 과거를 통하여 관계에 진출하였고, 1888년 4월에는 병조효력부위용양위부사용(兵曹效力副尉龍驤衛副司勇), 같은 해 6월에는 선략장군행(宣略將軍行) 용양위 부사과, 통정대부행훈련원첨정(通訓大夫行訓練院僉正) 등이 되었다. 1902년 10월 이후에는 정3품 통정대부 비서원승(秘書院丞), 호남시찰사(湖南視察使), 동래경무관(東萊警務官) 등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내정 간섭을 시작하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분개한 김광제는 관직을 사임하고, 우국충정의 발로로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간신들은 김광제의 상소문을 왜곡하였고, 결국 1905년 12월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특별사면을 받아 법부 참사에 임명되었으나 불복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활동 사항]

김광제는 1906년 1월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 사장에 취임하였고, 2월에는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가 설립한 사립보통학교 교장과 달명의숙(達明義塾) 부교장·강사로서 활약하였다. 대구광문사는 대구·경북 지역 지식인, 자산가, 관료 등의 지원을 받아 실학자 저술 발간과 신학문을 도입하여 자강 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선 출판사였다. 또한 도내 각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와 『월남망국사』 등 각국 망국사도 편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김광제는 대동광문회 부회장에 취임하여 경상도 내 사립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하는 근대 교육 운동을 펼쳐 나갔다. 대구관철사 신태휴(申泰休)는 김광제의 활동에 대한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고종은 특별 하사금 1,000원과 함께 「교육칙유」를 내렸다. 이후 김광제는 지방자치 실시를 목표로 조직된 계몽 단체인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소장을 맡았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김광제는 지방자치를 위한 선행 조건으로 근대 교육 시행을 우선시하여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文會)를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에서 시작되었다. 김광제는 발기 연설을 마친 후 당장 국채보상운동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담뱃갑과 담배를 버리고 3개월에 해당하는 담뱃값 60전과 특별 의연금 10원을 냈다. 현장에서 모금된 의연금은 2,000여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2월 초순 발기인들은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徐相燉),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朴海齡), 회원 김윤란(金允蘭), 장상철(張相轍), 강영주(姜永周) 등의 이름으로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전국에 발송하였다. 취지서의 요지는 대한민국 2천만 명이 담배를 끊어 담뱃값 20전씩을 3개월간 저축하면 1,300만 환이 되므로 전 국민이 3개월간 단연(斷煙)하여 차관을 갚아 일본의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내용이었다. 김광제는 동지들과 함께 대구에서 국채지원금수습사무소(國債志願金收拾事務所)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

김광제는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에 독립운동가로서 다양한 독립운동 방법과 계략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는 출판 활동을 통한 민중 계몽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으며, 국외적으로는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련의 상황을 조국 독립을 위한 기회로 인식하였다.

김광제는 1915년경 만주로 망명하여 압록강 대안의 흥경현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교육에 종사하였다. 1919년경 귀국한 김광제는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유학생들과 함께 제2의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동경 유학생 이달(李達)은 ‘2·8독립선언’ 당시 국권 회복을 위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김광제는 독립군 자금 조달을 위하여 다음 해 1월 국내로 잠입하여 박진호(朴鎭浩)와 함께 대구에서 「신대한민국청년단선언서」를 인쇄·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학생들은 김광제·백의수(白義洙)·이달종(李達鍾)·홍천갑(洪千甲) 등과 1920년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국내 및 동경의 한국인에게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 창립]

김광제는 노병희(盧秉熙) 등과 1920년 2월 16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2월 25일에는 노동단 조직을 위한 「노동단취지서」를 발표하는 가운데 단장에 추대되었다.

4월 11일에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된 직후 김광제 등을 중심으로 노동대회가 조직되었다. 그는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장과 경성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6월에는 노동대회 연기군지부, 조치원지부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기조 강연을 하였으며, 7월에는 개성지부 강연회 연사로서 참석하는 등 노동자 권익을 위한 활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독립에 앞장섰던 김광제는 1920년 7월 24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다가 갑자기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광제의 공훈을 기려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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