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94
한자 李之菡
이칭/별칭 형백(馨伯),형중(馨仲),수산(水山),토정(土亭),문강(文康)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7년연표보기 - 이지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이지함 청하현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8년 - 이지함 아산현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78년연표보기 - 이지함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3년 - 이지함 이조판서 추증
출생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부임지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부임|활동지 부임지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묘소|단소 이지함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인산서원(仁山書院)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서원리
사당|배향지 화암서원(華巖書院)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장산리 산27-1 번지]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 이조판서

[정의]

충청남도 보령 청라 지역 출신으로 『토정비결』의 저자인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지함(李之菡)[1517~1578]은 충청남도 보령 청라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이다. 수리(數理)·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 등에 달통하여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었으며, 『농아집(聾啞集)』 등을 저술한 문인이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이며,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이다. 이색(李穡)[1328~1396]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이치(李穉)[1477~1507], 어머니는 광산 김씨 김극성(金克成)의 딸이다. 전주 이씨 모산수(毛山守) 이정랑(李呈琅)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이산두(李山斗)와 이산휘(李山輝), 이산룡(李山龍)을 두었다. 측실(側室)과의 사이에서 서자 이산겸(李山謙)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지함의 집안인 한산 이씨 가(家)는 이지함의 아버지 이치가 보령의 세거 사족인 광산 김씨 김맹권(金孟權)[?~?]의 딸과 혼인하고 처가의 전장에 터를 잡으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광산 김씨 집안은 ‘청라 김씨’라 불릴 만큼 조선 초 보령 지방의 가장 유력한 사족이었다. 이치의 후손들은 청라동과 이웃한 장산리, 지금의 주교면 일대, 오천의 교성리 등에 넓게 퍼져 세거하게 되었다. 이치의 경제력은 슬하의 네 아들 이지영(李之英), 이지번(李之蕃)[1508~1575], 이지무(李之茂), 이지함으로 이어졌고, 한산 이씨는 보령의 명문 사족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지함은 외가인 청라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1489~1546]의 문하에 들어갔다. 전주 이씨 모산수 이정랑의 딸과 혼인한 후 처가인 충주에 거주하였다. 1548년 절친한 친구 안명세(安明世)[1518~1548]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사형을 당하고, 다음 해에 장인 이정랑마저 이홍남 고변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서울 마포 강가에 토굴을 파고 위에는 정자를 지은 후 스스로의 호를 ‘토정(土亭)’이라 부르며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지함은 수리·의학·복서·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달통하였는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현감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구상하던 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보령을 왕래하며 지냈다.

1578년(선조 11) 다시 아산현감으로 부임해 이른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걸인을 구조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였다. 아산 지역의 폐단을 뿌리뽑고자 애썼지만, 곧 아산현 관아에서 사망하여 그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비록 마지막 벼슬이 현감에 불과하였으나,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졸기(卒記)가 기록될 정도로 당대에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훗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토정유고(土亭遺稿)』 발문(跋文)에 “선조대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신하 중에 스승이 셋 있다면 그것은 이지함, 이이(李珥), 성혼(成渾)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토정은 스승인 서경덕의 다양한 학문을 흡수하면서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백성들 사이에서 제자를 기르며 처사(處士)의 삶을 살았다. 문인으로는 조카인 이산보(李山甫)[1539~1594]와 조헌(趙憲)[1544~1592], 서기(徐起)[1523~1591], 송제민(宋齊民)[1549~1602], 박춘무(朴春茂)[?~?]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조헌과 박춘무는 임진왜란 때 호서(湖西)의 병장(兵將)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지함의 아들 이산겸도 조헌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토정의 묘는 보령 고만(高巒)에 있는 아버지 묘 아래에 조성되었다. 조카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이지함의 묘갈명을 썼으나 묘비가 바로 세워지지는 않았고, 1995년에 고정리 묘역에 건립되었다. 고만에 있는 묘역에는 이지함이지함의 형제와 존비속(尊卑屬)의 묘 14기가 있는데, 명당 설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전설에는 토정이 감탄할 만한 명당이었지만, 막내 아들에게 좋지 않은 터라는 약점이 있었고, 막내였던 토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희생하여 이 자리를 선택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토정이 부모의 묘를 쓰기 위해 풍수지리를 살펴보는 것과 관련된 전설은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보령시 오천면 갈현리의 지루고개 이야기가 전해지고, 고만의 묘역을 오가던 길목을 ‘지함재’라 불렀다. 또 둘째 아들 이산휘가 시묘살이 중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를 피하지 못해 죽었는데 『선조실록』에도 이산휘가 호환으로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토정비결(土亭秘訣)』과 『농아집(聾啞集)』이 있다.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이지함선생묘가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713년(숙종 39)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령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원인 화암서원(華巖書院)에서 1624년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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