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12
한자 保寧 忠淸水營城
이칭/별칭 충청수영성,오천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심상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510년연표보기 - 보령 충청수영성 석축 성곽 축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76년 1월 8일 - 보령 오천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9년 8월 24일연표보기 - 보령 충청수영성으로 명칭 변경 및 사적 제501호로 승격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0~2011년 - 보령 충청수영성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시굴 및 발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5년 - 보령 충청수영성 가경고고학연구소에서 시굴 및 1차 발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5년 - 보령 충청수영성 한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동문지 및 주변 성벽 발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6년 - 보령 충청수영성 백제문화재연구원에서 동성벽 구간 발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6년 - 보령 충청수영성 가경고고학연구소에서 2차 발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6~2017년 - 보령 충청수영성 동방문화재연구원에서 남문지 주변, 남서 성벽 시굴 및 발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8년 - 보령 충청수영성 동방문화재연구원에서 남서 우치성 시굴 및 발굴
현 소재지 보령 충청수영성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 지도보기
성격 군영|유적|성
양식 평면 원형의 성
관련 인물 이장생|이량
크기(높이,길이,둘레) 1,650m[둘레]
면적 125,326㎡
소유자 국유 외
관리자 보령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501호

[정의]

조선 시대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 침탈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수군영.

[개설]

보령 충청수영성(保寧 忠淸水營城)은 조선 시대 충청수영의 수군절도사가 근무하는 해안에 있는 성이다. 보령 충청수영성은 왜구 침탈을 방지하는 것 외에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였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바다로 연결된 봉수대(烽燧臺)를 운영하였다. 보령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의 수려한 경관에 설치되어 영보정이란 정자가 유명하였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1895년 충청수영이 폐영(閉營)되어 수영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건립 경위]

보령 충청수영성은 고려 말 조선 초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서해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설치되었고, 1396년 홍자해를 고만(高巒)의 첨사로 임명한 것이 시초이다. 보령 충청수영성은 처음에는 고만에 설치되었지만, 얼마 후에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인 대회이포(帶回伊浦)로 옮겨 만들어졌다. 보령 충청수영성의 성벽은 1510년에 이장생(李長生)이 돌로 쌓았으며, 1896년 폐영될 때까지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 침탈을 방지하였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위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보령 충청수영성은 충청남도 서부 해안과 안면도로 둘러싸인 수심 20m의 비교적 깊은 내만인 천수만의 남쪽 해안 구릉부에 설치되어 있다. 보령 충청수영성오천항이 들어선 북서부와 성 내부 관아 시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동벽과 남벽, 서문이 남아 있다. 보령 충청수영성 내부에 오천면 행정복지센터, 오천초등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형태]

보령 충청수영성은 천수만의 오천항 남쪽의 해발 40m 정도의 야산 능선과 곡부를 포함해 평면 원형에 가깝게 설치된 해안성이다. 그런데 보령 충청수영성이 동쪽과 남쪽 능선을 따라 성벽이 설치되고, 북서쪽의 오천항 뒤편으로 연결되어 입체적으로 보면 삼태기 모양이다.

[현황]

보령 충청수영성의 둘레는 약 1,650m이다. 해안 쪽으로 서벽이 통과하며 서벽의 길이는 370m에 달하지만, 시가지의 조영으로 인하여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150m 정도와 서문이 남아 있다. 서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고도 불리며 치석한 석재로 아치형이다. 문 폭은 3m, 높이는 4m이다. 북벽은 길이가 310m 정도인데, 북문지로 추정되는 부분에 도로가 통과하면서 문지와 성벽 일부가 사라진 상태이다. 280m가량의 동벽 중간부에 동문지가 있다. 동문지의 북측에는 사각형 석주가 놓여 있는데, 문에 사용하였던 석재로 보인다. 동문지의 남쪽 성벽에는 여장(女墻)[성벽 위에 설치한 높이가 낮은 담. 몸을 숨기고 적을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 일부 남아 있고, 높이는 90㎝이다.

남벽은 민가와 도로로 일부 훼손되었지만,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남벽에는 진남문(鎭南門)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어져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남벽에는 치성(雉城)[치(雉) 또는 치성(雉城)은 성이나 요새를 축성할 때 성벽의 일부를 망루처럼 돌출하게 만들어서 적을 공격하기 쉽게 설계한 부분]이 두 곳 확인되고, 남벽의 두 모퉁이에도 모두 치성이 설치되어 있다. 치성의 간격은 120m로 동일하다.

보령 충청수영성 관련 기록과 지도에는 전패(殿牌)를 봉안한 운주헌(運籌軒)을 비롯하여 수군절도사의 집무 공간인 공해관(控海館), 뛰어난 경치로 유명한 영보정(永保亭) 등 많은 건물이 있지만, 대부분 없어졌다. 빈민 구제를 담당하였던 건물인 진휼청(賑恤廳)과 자리를 옮겨 보호되고 있는 운주헌 일부와 공해관의 외삼문만이 남아 있다. 충청수사 이량(李良)이 1504년 세운 영보당은 187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15년에 원위치에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보령 충청수영성은 근대에 들어 도로 개설이나 해안 매립, 성 내부 도시화로 일부 구간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성벽과 지형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조선 시대 충청 지역의 수군 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 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 주는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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