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07
한자 趙昌遠
이칭/별칭 대형(大亨),오은(悟隱),혜목(惠穆),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3년연표보기 - 조창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조창원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종군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조창원 형조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조창원 아버지 조존성 병환 봉양
활동 시기/일시 1631년 - 조창원 군자감정(軍資監正)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8년 - 조창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짐.
몰년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조창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66년 - 조창원 시호 혜목(惠穆) 추증
거주|이주지 낙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지도보기 다락골마을
부임|활동지 부임지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부임|활동지 부임지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
부임|활동지 부임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묘소|단소 조창원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주
대표 관직 인천부사|영돈녕부사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 문인.

[개설]

조창원(趙昌遠)[1583~164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할아버지가 충청남도 보령에 입향하였고, 아버지가 보령에 은거하면서 그 또한 보령에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셋째 딸이 인조의 계비가 되면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대형(大亨), 호는 오은(悟隱)이다. 할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조남(趙擥), 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조존성(趙存性)[1554~1628], 어머니는 용인 이씨 이신충(李藎忠)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 최철견(崔鐵堅)의 딸이다. 셋째 딸이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활동 사항]

양주 조씨조창원의 아버지 조존성이 외가 경주 이씨 집안의 세거지인 충청남도 보령에 은거하면서 보령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창원조존성의 둘째 아들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나이 30세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당시 방목(榜目)에는 거주지가 한성으로 기재되어 있다. 아버지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주로 한성[서울]에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별좌(別坐)·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 대에 정세가 어지러워지고 아버지가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화를 당하자, 조창원은 관직을 내려놓고 시골에 가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조존성의 3남 조계원(趙啓遠)[1592~1670]이 보령 탑동에서 말년을 보냈던 것을 볼 때 조존성이 머물렀던 곳도 탑동이었을 것이다. 조창원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형조좌랑에 제수되었고, 직산현감을 맡아 많은 치적을 올렸다.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조창원이 직산현감으로 있을 때 치밀하게 일을 살펴 공정하고 분명하다는 소문이 이웃 고을까지 알려지자 송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관아에 낸 비용이 산처럼 쌓였고, 그것으로 백성들의 묵은 세금을 탕감해 주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높이 사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승진되었다가 다시 여산군수에 제수되었다. 1628년 여산군수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하며 관아에 연못을 만들어 정자를 짓고 ‘근민당(近民堂)’이라 편액하였다. 이어 인천부사 재직 시 딸이 인조의 계비(繼妃)로 간택되자 보국숭록대부 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배수되었다.

조창원은 직임을 맡을 때에는 청렴함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안정함으로 백성을 다스려서 번거로움을 제거하고 병폐를 없애면서도 명예를 탐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편안하고 정사가 엄하였다. 부모를 모실 때에는 온화함과 공경함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여막에 있을 때에는 채소와 과일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되어 부귀해진 뒤에는 자신을 억제하고 조심하기를 더욱 지극히 하였다. 집안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포의(布衣)로 분수를 뛰어넘어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오르니, 이는 영화가 아니요 재앙이다. 또 다시 사치함으로써 넘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의복과 기물과 주택을 예전보다 조금도 늘리지 않았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기록된 조창원의 졸기(卒記)에는, 여러 고을을 두루 맡아 다스리며 부지런하다는 이름이 났고, 국구가 된 후에는 스스로 근신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혜목(惠穆)이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황의천, 『보령의 인물』(보령문화원, 2015)
  • 두산백과 두피디아(https://www.doopedia.c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