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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92
한자 李浚慶
이칭/별칭 원길(原吉),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충정(忠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99년연표보기 - 이준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4년 - 이준경 충청북도 괴산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06년 - 이준경 신승연과 황효헌에게 수학
활동 시기/일시 1531년 - 이준경 식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33년 - 이준경 권신 김안로 일파의 모함으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48년 - 이준경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50년 - 이준경 이기의 모함으로 보은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55년 - 이준경 을묘왜란 때 왜군 격퇴
활동 시기/일시 1565년 - 이준경 영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이준경 하성군 이균을 왕으로 세움.
몰년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이준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8년 - 이준경 선조의 묘정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66년 - 이준경 구계서원에 제향
묘소|단소 이준경선생묘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로 308-41[부용리 산35-1]
사당|배향지 구계서원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안뜸로47번길 28[분평동 251-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주
대표 관직 영의정|영중추부사

[정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사림정치를 정착시키고 선조(宣祖)[재위: 1567~1608]를 왕위에 올려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극감(李克堪)[1423~1465],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세좌(李世佐)[1445~1504]이다. 아버지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이수정(李守貞)[1477~1504], 어머니는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준경은 조선 초기부터 충청남도 보령에 세거해 온 광주 이씨 집안 출신으로 보령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세좌는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 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賜死)되었고, 아버지 이수정은 연좌되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 이때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1498~1562]과 함께 괴산에서 아버지의 곁에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해배(解配)된 후 외할아버지 신승연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연경(李延慶)[1484~1548] 문하에 들어갔다. 24세였던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입격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두 방목(榜目)에는 모두 거주지를 한성으로 표기하였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한성부 인물조에 등재되어 있다.

문과 급제 후 한림(翰林)을 거쳐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33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경연에 나아가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 사류(士類)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에서 화를 입은 사류의 무죄를 역설하다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1481~1537] 일파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중종(中宗)[재위: 1506~1544]이 붕어한 후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때에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재직 중이어서 화를 면하였다. 1550년 영의정 이기(李芑)[1476~1552]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고, 1553년에 함경도순변사(咸鏡道巡邊使)가 되어 야인(野人)의 침입을 방비하였다.

1555년 을묘왜란(乙卯倭亂)[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달량포(達粱浦)에 왜선(倭船) 60여 척이 쳐들어온 사건] 때에는 전라도순찰사로 출정하여 격퇴하면서 벼슬이 올랐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67년 하성군(河城君) 이균(李均)을 왕[선조(宣祖)]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조선 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기묘사화로 피화(避禍)된 조광조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을사사화 피화인들을 신원(伸冤)하였으며, 유배지에 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상소를 통해 붕당의 조짐이 있다는 유차(遺箚)[죽음에 임해 올리는 약식 상소문]를 올렸으나, 대신들이 선조에게 이준경이 사림에게 화를 끼치려고 그런 말을 만들었다고 하여 관작이 추삭(追削)되었다.

인조(仁祖)[재위: 1623~1649] 때의 문인 이덕형(李德泂)[1566~1645]은 조선 전기에는 황희(黃喜)[1363~1452]와 허조(許稠)[1369~1439]가 있지만, 후기에는 정광필(鄭光弼)[1462~1538]과 이준경이 있다며 어진 정승의 상징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동고유고(東皐遺稿)』, 『조선풍속(朝鮮風俗)』이 있다.

[묘소]

이준경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로 308-41[부용리 산35-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현 충청북도 청주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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